<역사청산 최우선 대상 홍두표사장>

홍사장은 서울대 사회학과와 경희대대학원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에 공보처의 전신인 공보부를 통해 사회에 첫발을 디뎠다. 이후에 그는 공보부 산하기관인 KBS를 통해 방송계로 입문했다. 하지만 그의 방송 경력은 64년에 옮긴 TBC가 80년 KBS에 통폐합되면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통폐합 당시 뼈를 깍는 노력으로 환심을 사 확보한 자리가 군부에 의해 유린되는 것을 보고 당시 사장이던 그는 “언젠가를 TBC를 찾자”며 맹세했던 주역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13년 후에 KBS의 사장으로 부임한다.

그는 재임중에 막대한 공익자금을 국책사업과 언론인 매수 등에 동원하면서 정권측의 인정을 받았으나 거액을 들인 남한강수련원과 프레스센터건립과정에서 건설사측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진정이 들어와 감사원으로 부터 감사를 받기도 했다. 그후에도 홍사장은 전매청장, 담배인삼공사 사장(’87) 등의 요직을 거쳤다. 결국 그의 권력지향적인 행각은 문민정부의 등장으로 마감되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비웃듯이 KBS사장으로 낙점받아 방송계를 놀라게 했다. 홍사장은 취임 후에도 순탄하지 만은 않았다. 내정설의 사전유출과 공직자 재산등록시 재산 은폐설과 전·노씨에게 정치자금을 주었다는 의혹을 받는 등 고초를 겪어왔다.

<충성 속에 무너져버린 공영방송>

TBC출신인 홍두표사장은 삼성을 등에 엎고 정치권으로 진입하려는 꾸준한 노력을 해왔다. 그러나 국회의원 출마나 장관입각 계획 등이 차질을 빚자 현재는 KBS사장 연임으로 방향을 선회 △현정권에 충성하는 방송보도 △핵심실세와 정보기관에 물심양면의 로비 △방송단일노조 건설 저지 등 점수따기작전을 펴고 있다.

홍사장의 두개의 패러다임은 삼성과 정권이었다. 홍사장은 93년 부임후 1년만에 약 40여건의 삼성관련 뉴스를 다뤘다. 올해의 촛점인물로 삼성의 이건희회장을 선정, 개혁주체의 경영인으로 우상화(93년12월)한 것을 비롯 대부분 삼성을 홍보하는 기사를 보도한 반면 삼성비리 관련보도는 아예 기사화하지 않음으로써 삼성봐주기를 일삼았다.

정권을 향한 방송은 93년 2월 김영삼정권이 들어선 후 ‘안가철거’ ‘칼국수 점심’ ‘청와대 앞길개방’ ‘금융실명제’ 등 정권이 내놓은 각종 정책과 홍보성 이벤트를 과대포장, 국민들에게 선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특히 KBS는 정권이 원한다면 국민을 대상으로 서슴없이 전쟁위협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정부가 94년 6월8일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주재하면서 ‘선제재, 후대화’쪽으로 대북정책을 선회하자 같은날 KBS 뉴스는 정부의 발표내용을 20분간 그대로 전달하고, 특집을 마련 30분간 전쟁화면을 집중 방송하며 전쟁분위기를 고취시켰다. KBS가 겉으로 나타나는 프로그램의 경쟁력에도 불구하고 공영성을 확보하지 못한 것은 홍사장이 공영방송을 개인의 욕심에 이용하려고 한데 따른 것이다.

<정실·외압에 얼룩진 인사>

홍사장 인사는 한마디로 KBS공영방송의 수치였다. 홍사장은 끊임없이 외압에 흔들리는 인사를 단행했고 자신에 대한 충성을 잣대로 정실에 의한 인사를 단행했다.

홍사장은 93년 12월 단체협약을 무시하고 라디오본부장과 기획조정실장의 교체인사를 함으로써 조합 집행부는 철야농성을 해야했다. 94년2월에는 개혁이라는 미명하에 단행한 대규모 인사에서 육사출신 차장의 파격적 승진, 농협티켓을 받아 물의를 일으킨 인물의 승진보임, 정보기관 실력자 동생에 대한 배려 등 보복성 인사, 청탁성 인사, 문제인물의 파격적인 발탁 인사, 정치성 특채자 요직 임명, 단체협약과 노사합의 위반, 본사와 지역간의 형평성 파기 등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또 같은해 8월 구TBC출신들을 요직에 앉힌 대표적인 정실인사를 통해 친정체제를 완벽하게 구축한다. 지난 연말과 올 연초의 파동은 학력비리자에 대한 보직발령인사였다. 이는 결국 인사를 철회해야 하는 상황까지 연출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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