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림씨 망명과 관련, 중앙은 지난 18일자 1면에 성혜림씨의 아들로서 김정일비서의 가장 강력한 후계자로 알려진 김정남이 후계구도에서 이미 멀어진 것으로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반면 동아는 “김정일의 장남이자 최근 북한체제 내부에서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 김정남”이라고 기사화했다. 김정남을 두고 중앙은 ‘후계구도에서 밀려난 인물’로, 동아는 ‘최근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 인물’로 상반된 보도를 한 것이다.

성씨 일행의 행선지에 대해서도 스위스,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 등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가 거론됐다. 최근에는 “미국으로 갔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근거도 빈약하기 짝이 없다. 심지어 프랑스의 한 정보소식통이 프랑스의 남부 지방을 구체적으로 거론했다며 그가 “그곳의 호텔이나 별장에서 돈많은 아시아인으로 행세하며 얼마간 숨어지내는 것은 식은죽 먹기”라고 말한 것을 근거라고 내세우는 형편이다.

김정일의 여자관계에 대해 “누구와도 결혼한 적이 없다”는 기사가 나오는가 하면 성혜림씨에 대해 ‘공식적으로 이혼하지는 않은 상태’라는 기사도 나왔다. 어쨌든 둘중의 한 기사는 틀린 것이 분명하다.

‘불확실한 추측’ ‘과도한 지면늘리기’가 이번 성혜림씨 망명보도의 특징이자 문제다. 이때문에 “이한영씨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무조건 기사가 된다”는 비이성적 풍토가 우리 언론을 지배했다. 그의 위치에 대한 별다른 고려없이 ‘조총련 박정희 전대통령 암살 계획’ ‘김일성 아들 또 있다’ 등이 기사화됐다. ‘사실확인’이라는 언론보도의 원칙은 실종됐다. ‘이한영씨에 따르면’이라는 말만 들어가면 무엇이든 기사화가 가능했다. 단골메뉴인 조선(북한)정권의 붕괴 위험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잇따른 탈북사태를 조선(북한)정권의 ‘종말의 시작’으로 연결짓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지난 13일 조선의 첫보도를 포문으로 시작한 언론의 성혜림씨 망명보도는 전두환씨의 공판이 열린 26일을 기점으로 지면에서 사라졌다. 언론은 언제 그랬냐는듯 뒷짐을 지고 있다. 큰일이 날것처럼 흥분하던 언론의 돌변한 태연함에 국민들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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