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에 나오지 않으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다. 과장된 것처럼 보이는 이 단순명쾌한 논리는 미디어가 세상을 복제하고 세상이 미디어를 복제하는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은 우리 시대의 풍경이다. 그리고 구스 반 산트감독의 <2 다이 4>(이 제목은 의 표기이다)는 말 그대로 텔레비전 같은 영화로서의 이중의 풍경화이다.

미국의 작은 도시에 사는 수잔(니콜 키드만)은 래리(맷 딜런)과 결혼한다. 수잔 평생의 꿈은 텔레비전으로 유명해지는 것. 그녀는 지방방송 일기예보 리포터를 맡아서 ‘작은 인기’를 얻는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래리는 수잔에게 아기를 갖자고 조른다. 수잔은 남편이 거추장스러워지자 고등학교 남학생들을 유혹한 다음 살인을 교사한다. 남편은 살해되고, 범인은 잡힌다. 그러나 수잔은 법정에서 오히려 남편이 마약중독자이며, 남학생들은 마약운반책이었다고 증언한다. 수잔은 풀려나고, 소원대로 유명해진다.

구스 반 산트는 이중의 격자를 짠다. 하나는 1940년대 필름 느와르 전통 속의 ‘운명적인 요부’ 팜므 파탈(Femme Fatal) 주인공의 이야기처럼 배열된 영화적 인과관계이고, 또 하나는 명백히 O J 심슨 재판에 대한 간접적인 진술을 담고 있다. 영화의 고전적인 장르의 주인공과 텔레비전의 기억에도 생생한 사건의 주인공은 서로 뒤얽히고, 둘은 서로 맞서고 때로는 서로를 고발하거나 배신하는 관계가 된다. 그러나 잠깐, 정신차릴 것. 그 둘은 한명의 주인공이며, 수잔은 미디어 사이에서 정신분열증에 빠진 우리의 코기토이다.

영화는 텔레비전 모니터처럼 꾸며진 카메라 프레임 앞에서 토크 쇼에 나와(또는 토크 쇼 무대처럼 꾸며진) 자신의 사건을 진술하는 수잔의 바스트 쇼트(텔레비전의 전형적인 화면 크기)로 시작한다. 계속해서 수잔의 진술은 수잔의 사건에 개입한다. 그래서 드라마로서의 수잔의 사건과 수잔의 사건에 대한 진술이 평행하게 전개되는데, 두개의 진술과 사건은 빈번히 모순되거나 또는 일부 진술이 거짓이며 조작됐고 때로는 자의적으로 해석된 것(마치 스크립이 대본이라도 써준 것처럼 읽거나!)임을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영화 속의 드라마를 텔레비전으로 다시 보고, 텔레비전으로 진술되는 수잔의 태도를 영화로 관찰함으로써 두개의 미디어는 카메라를 중심으로 서로 다른 질서에 따라 전개된다. 구스 반 산트는 그 어느 쪽이 사실이며 어느 쪽이 거짓인지를 모호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보여주는 장면들은 수잔의 플래쉬 백(기억과 과거 사이에 걸쳐있는 영화의 모호한 수사학)이며, 말하는 장면들은 플래쉬 백의 앞과 뒤에 배치되어 있어서 일부 과정을 생략하거나 보충하며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받아들이도록(강제로!) 배치돼 있다. 사실과 거짓말 사이의 긴장관계?

아니, 그렇지 않다. 그 모든 것을 마지막 순간 구스 반 산트는 모골이 송연하도록 뒤짚는다. 수잔은 살해당했으며, 이 모든 진술은 죽은 여자로부터의 진술이었음이 밝혀진다. 그러니까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로부터 구성된 진술에 따라 남편살인의 이야기가 전개된 것이다.

그래서 이제 이 이야기의 진위여부는 처음부터 가릴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텔레비전이 진술하는 내용에 빠져들면서 그것을 전달하는 형식의 여부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았던급소를 찔리우게 된다. 그럼으로써 주어도, 목적어도, 대상도 분명치 않았던 이 영화의 제목이 사실은 텔레비전 미디어에서 시청자들이 사로잡힌 관심의 ‘정식화’라는 것을 보여준다. 텔레비전은 우리 마음 속의 풍경이다.

우리는 풍경을 보고, 풍경 속에 우리가 있다. 서로는 마치 남인 것같은 원근감 속에서, 주사선의 철창 사이로 서로를 바라보며, 점점 존재하지 않는 것같은 대상이 되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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