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시인이 <새벽별> 등 신작시 다섯 편을 <창작과 비평> 봄호를 통해 발표했다. 박노해시인의 이번 신작 시편들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으로 수감된 후 두번째로 발표되는 것으로, 그동안 그를 접견한 신부·수녀를 비롯해 친지 및 가족들이 그의 구술을 받아 기록해둔 것을 수록한 것이다.

이번 시편들 중 <맑은 눈의 메아리> <그대 속의 나> <그날 이후> 등에 묘사된 감옥에 갇힌 시인의 처연한 심정이 읽는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지만,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시적 태도는 인식의 치열함이다.

가령 <새벽별>과 <목화는 두 번 꽃이 핀다>. 창살 안의 시인에게 새벽별은 우선 감탄의 대상으로 자리한다. 왜냐하면 ‘어둔 밤이 지나고 / 새벽이 온다고 / 가장 먼저 떠올라’ 세상을 비추는 것이 새벽별 아닌가. 또 그 새벽별에 감탄할 수 있는 것은 밤을 지새운 자의 몫이라는 시대적 상식과, 시인 자신 역시 그에 걸맞게 살아왔다는 은밀한 자긍심이 뭉뚱그려져 새벽별 옆에 시인은 감탄사를 자연스레 달아놓는다. 새벽별은 ‘전위’와 전위에 서있는 자가 느끼는 ‘환희’에 대한
일종의 은유인 셈이다. 시인은 그렇게 감탄한다.

하지만 ‘아니네!’라는 단말마적인 부정으로 말미암아 시인의 감탄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새벽별은 ‘가장 먼저 뜨는 찬란한 별’이라기 보다는 ‘뭇 별들이 지쳐 돌아간 뒤에도 /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는 별’ ‘가장 나중까지 어둠 속에 남아 있는 / 바보 같은 바보 같은 별’임을 새삼 깨닫기 때문이다.

뒤늦은 자괴감? 그렇지 않다. ‘봄날 피는 꽃만이 꽃이랴 / 눈부신 꽃만이 꽃이랴’(<목화는 두 번 꽃이 핀다>)라는 날 선 부정의 정신을 시인은 도도하게 내세운다. 가장 먼저 빛을 발한다고 여겨졌던 ‘새벽별’을 통해서는 ‘새벽 붉은 햇덩이에 손 건네주고 / 소리없이 소리없이 사라지’는, ‘그래서 진정으로 앞서가는 / 희망’을 읽어낸다. 화사로운 외양에 현혹되는 ‘목화꽃’을 통해서는 몸은 앙상히 말라가도 ‘최후의 생을 바쳐 피워낸 꽃 / 패배를 패배시킨 투혼의 꽃!’을 발견한다.

그럼으로써 앞선 것과 끝까지 지속되는 것, 거짓 화려함과 참된 풍요로움의 이항대립 사이에서 시인은 또렷하게 한쪽으로 자신을 끼워넣는다. 그 추동력이야말로 시인이 붙들고 있는 현재 최대의 싸움인 셈이다.

갑갑한 것은, 그 싸움은 감옥 안의 싸움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90년대를 오롯이 감옥에서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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