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란 참 아름다운 것이다. 어떤 경우엔 경건하고 숭고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중요한 건 의리를 발휘하는데 있어서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다. 공적인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사사로운 의리에 얽매인다면 그건 추악하거니와 부도덕하다. 이 점을 분명히 해놓고 우리 시대의 ‘의리론’에 대해 생각해보자.

의리를 배신한 5공인사들

<월간조선> 96년 1월호는 전두환씨의 장남 전재국씨와의 인터뷰 기사를 싣고 있다. 전재국씨가 한 말에 다 동의할 수는 없다. 아니 5·18을 보는 그의 시각은 아무리 부자관계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대단히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의 말 가운데 가슴 깊이 와 닿는 게 딱 두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그가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에게 했다는 충고다. “당신이 바쁠수록 국가에 해를 끼친다. 대통령 아들은 사람들과 만나는 걸 피해야 한다.” 또 하나는 그가 최근 정치권을 바라보며 느끼고 있는 ‘인간에 대한 회의’다. 이걸 물고 들어가면서 이야기를 해보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김윤환 신한국당 대표는 아버지와 노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했습니다. 그런 분이 5·18 특별법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윤여준 청와대 대변인은 5공 당시 어머니의 비서실장을 했습니다. 그런 분이 김대통령을 대독해 ‘5·18 특별법은 명예혁명…’ 운운했습니다. 과연 이렇게 사는 것도 산다고 할 수 있습니까.”

5, 6공에 적극 참여했던 모든 정치인들은 가슴이 뜨끔할 것이다. 그들에게도 양심이 있다면 말이다. 그들과 두 전직 대통령이 의리로 맺어진 사이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흔히 ‘도의적 책임’으로 통용되는 공적 의리라고 하는 것도 있지 않을까? 5·18 특별법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인 만큼 과거에 대해 참회한다는 점에서 지지를 하는 건 백번 잘한 일이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엔 구 정치인들에게 문제가 많다면서 정치권의 세대교체를 역설하는 사람들이 많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우리 정치권에서 ‘의리’가 사용되는 걸 보면 참 재미있다. 자기가 유리할 때에만 ‘의리’를 들먹인다. 떳떳하지 못하지만 실속이 있는 일을 할 때에 예외없이 따라붙는 변명이 바로 ‘의리’다. 반면 자기가 손해보는 경우엔 좀처럼 의리를 앞세우지 않는다. 그럴 땐 또 명분론을 앞세운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의리론을 재정리해야겠다. 이렇게 하자. 공사를 불문하고 자기가 손해보는 일에 의리를 앞세우는 것이 진정한 의리고 자기가 이익보는 일에 내세우는 의리는 진정한 의리가 아니다.

한가지 문제가 있기는 하다. 그런 정의에 따르자면, 장세동씨 같은 사람이 진정 의리가 있는 사람이 된다. 하긴 그래서 언론이 그를 호의적으로 보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냉철히 따져보면 그것도 아니다. 이제 와서 장세동씨가 전두환씨에 대한 ‘의리’를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이익볼 게 뭐있나?

장세동씨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아닐까? 그가 진정 의리가 있는 인물이라면 오래전 국민에 대한 의리를 먼저 지켜야 했던 것 아닌가?

‘의리’와 ‘명분’,그 위험한 곡예

지금 우리는 ‘의리 부재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의리는 전혀 지키지 않으면서 의리를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의리도 사라진지 오래고 의리를 지키지 않으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예전에 상하관계 또는 동지 관계였다가 그 관계가 깨지면 책이나 글을 통해 상대에게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을 늘어놓는 사람들도 그런 ‘의리 부재의 시대’가 낳은 사생아이다. 공익에 도움이 될 무슨 큰 건이나 폭로하면서 그러면 말도 않겠다. 순전히 주관적인 판단을 앞세워 상대를 죽이려 든다. 그것도 자신의 실속을 챙기면서. 처음부터 사람을 잘못 본 자신의 과오에 대한 반성이라도 하면서 그러면 또 모르겠는데, 자기는 무조건 정의의 화신처럼 행세하니 그것 참 대단한 배짱이다. ‘의리 불감증’에 걸려 있는 우리 사회의 추악한 일면치고는 보기에 너무 역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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