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년 벽두, 이야기 만화 작가이던 고우영씨가 시사만화가로 등장했을 때 세인들은 그의 변신을 기대반 우려반으로 지켜봤었다. 그가 쌓아온 관록과 명성, 그리고 사실에 엄격하면서도 자유분방한 사고를 하는 그라면 규격화된 구성과 구태의연한 발상법을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적지 않았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야기 만화와 시사만화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과 함께 매일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 가운데 핵심 사안을 골라 그 맥을 짚어낼 수 있는 고도의 정치·사회적 의식이 뒷받침될 수 있겠느냐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

이제 두 달. 그의 변신 행보에 쉼표를 찍으며 되돌아 본 고우영의 시사만화는 기대보다는 우려 쪽에 더 치우치는 느낌이다.

고우영 씨의 시사만화에서 우선 눈에 띄는 점은 정치지향적인 다른 시사만화와는 달리 사회지향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본드 흡연(1월 22일), 대입 풍경(1. 5), 서태지 파문(1.26, 1.30), 63빌딩 정전소동(1.27), 영국 왕세자 이혼 소동(2.6) 등등.

다른 시사만화가 정치 지형도를 그리고 있을 때 그는 ‘소소한’ 사회 문제들을 소재로 삼았다. 언뜻 봐서는 소재의 다변화를 꾀한 새로운 시도라고 평가될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왜 그것이 소재로 등장해야 했는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소재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개구리 할아범’(1.13)과 ‘선물 리콜제’(1.18), ‘할아버지 잔소리 기피증’(1.6) 등은 소재 고르기에 고심하다 ‘대충’ 땜질했다는 느낌마저 들게 하는 것들이었다. 문제의식도 녹아있지 않았다. 서민들의 삶의 애환도, 삶을 굴절시키는 사회상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삶의 시대적 정서를 찾을 수 없는 사회성 소재들이라면 그것의 존재 의미는 희박해진다. 하지만 고우영씨는 그것들을 선호해 왔다.

덕분에 한국일보의 시사만화는 정치 평론의 제1선에서 물러서야 했다. 어느 때보다도 정치 사안들이 많았던 시절, 한국일보는 정치 평론에서 상대적 열세를 면하기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사회성 소재(그것도 맥 빠진)가 예민한 정치 사안을 비껴가는 우회로로 기능한 셈이었다.

양의 열세가 반드시 질의 열세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런’ 정치 만화를 늘어놓기보다는 ‘짧고 굵은’ 만화로 정치 문제의 급소를 짚어내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상식적 해석과 상투적 발상을 넘어서지 못하는 밋밋한 평론들이 대부분이었다. 4·11 총선이 있기에 봄이 싫다는 극단적 시각(1.19)이 펼쳐지는가 하면, ‘전씨 비자금 4천만’(1.14) 식의, 이미 노태우 비자금 사건 때 국민 개개인이 한번쯤은 생각하고 지나갔던 내용이 되풀이 되기도 했다.

급소 짚기에 실패해 온 고우영 씨의 시사만화.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되는 사실이 있다. 시사만화는 만화이기 이전에 칼럼이라는 사실, 만화적 사고와 기법에 정치·사회의식이 스며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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