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대’란 그것의 생물학적 정의를 빼고나면 사실상 아무 의미도 없는 용어이다. 생물학적 의미의 신세대라는 것도 여러 방식으로 정의될 수 있다. 가장 안전한 것은 유전자 재생산의 잠재력이 준비완료되는 10대 후반에서부터 그 잠재력의 실질적 행사가 시작되는 30대 이전까지를 신세대로 한정하는 정의 방식이다. ‘젊은 세대’라는 말은 대체로 이 정의에 가까운 통상적 용어이다. 그러나 그 의미의 ‘젊은 세대’는 사회문화적 차원에서는 무의미하다. 나이가 젊다는 것은 생물학적 차이성일 수는 있어도 문화적 변별성이나 차별성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신세대’라고 부르는 것은 실체없는 허상이고 의미없는 허사이다. 10대 후반 30대 이전까지의 연령 계층을 구성하는 개개의 인자들은 그 행태, 가치관, 목표, 의제가 제각각이며 이 개인적 개별적 차이들은 그 계층 구성인자들을 한두 개의 일반 범주로 묶을 수 없게 한다. 무엇보다도 그 개인적 차이들은 어떤 특정 연령계층과의 횡적 관계보다는 연령 이외의 사회문화적 요소들과 더 강한 통시적 종적 관계를 맺고 있다. 지금의 젊은 세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과거의 모든 젊은 세대들이 그러했다.

그렇다면 요 몇년간 우리가 열심히 ‘신세대’라고 불러온 세대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그 세대는 사회문화적 동질집단 또는 동류집단으로 분류될 정도의 특징, 변별성, 고유성을 갖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어떤 동류성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상업주의 문화가 젊은 세대의 소비충동을 자극하기 위해 ‘만들어낸’ 몇몇 소비 취향 뿐이며 그 취향을 묘사하는 몇 개의 형용사들 뿐이다. ‘감각적’이라거나 ‘경박하다’라는 것이 그런 형용사들이다. 우리의 신세대란 이처럼 기성 세대의 손에서 만들어진 신세대, 기성의 사회경제적 필요에 따라 그 취향을 결정 당한 세대, 그리고 그 취향 때문에 어떤 때는 부추겨졌다가 또 어떤 때는 구박받는 불쌍한 세대이다.

더 고약한 것은 이 ‘형용사적 존재’로서의 신세대라는 것을 만들어놓고 그 취향을 ‘획일화’한 다음 그것에 열심히 아부하는 기성 세대의 행태이다. 신문, 잡지, 방송들이 신세대 감각을 말하고 “신세대에 맞게”를 외칠 때 그들이 찾아헤매는 것은 바로 그 획일화된 신세대이고 획일화된 신세대 감각이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이 획일화란 상업적 다양성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다양성이란 것을 철저하게 상업주의에 종속시킨 획일성, 곧 다양성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획일주의를 의미한다. 이 의미의 다양성은 구매 충동을 자극하는 최선의 자원이다. 말하자면 기성 세대는 신세대 취향을 특정 방향으로 결정한 다음 그 취향에 아부하고 그 방식으로 “돈이나 벌자”며 나서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신세대를 위한 일도,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한 일도 아니다. 이 각성은 어느 분야보다도 언론의 경우에 더 필요하고 절실하다. 우리가 길러야 하는 신세대는 어떤 획일주의에도 빠지지 않는 신세대, 제각각 특징 있는 목표와 가치와 행태를 추구하는 신세대, 그래서 모든 획일적 묘사의 가능성을 거부하는 신세대, 비동질적인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신세대이다. 그 신세대는 자기를 규정하는 어떤 일반 명칭도, 집단적 고유성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런 세대 구성원들만이 파시즘의 먹이가 되지 않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상업주의적 파시즘이 만들어내고 길들이고 그래서 파시즘 문화에 길드는 신세대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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