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대통령 2명이 한꺼번에 법정에 서는 ‘세기적 재판’이 우리 눈앞에서 진행되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 표현에 값하는 긴장감이나 역사적 의미를 온몸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무엇인가 답답함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음을 숨길 수 없다.

지금 역사는 진정 바로 세워지고 있는가. 지금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는 것이 참된 개혁인가. 어쩔 수 없이 되묻게 된다. 이같은 회의적 사고 또는 의식은 어디서 연유된 것일까 자문해본다.

26일 있었던 전두환씨의 첫공판에서 그는 자신이 돈을 건네준 정치인, 언론인의 명단을 밝혀 달라는 검찰의 ‘요청’에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라고 대답한 것으로 보도됐다. 검찰의 더이상의 추궁은 없었다. 마지 못해 한마디 하고 지나가는 듯한 검찰의 모습과 ‘다 알면서 뭘 묻느냐’는 식의 전씨 답변에서 우리는 현재 진행중인 이른바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에 어떤 결정적인 한계가 존재한다는 점을 직감할 수 있다.

‘전두환씨는 밝혀야 한다. 검찰이 반드시 밝혀야 한다. 이도 안되면 재판부에서라도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우리는 이같은 주장과 주문을 수십년간 해왔다. 마치 은폐를 위한 후렴처럼.

휘몰아치는 바람처럼 진행되는 듯한 개혁의 와중에서도 어김없이 ‘금단의 땅’은 존재해왔다. 그렇지 않은 기억을 우리는 경험한 적이 없다. 이른바 문민시대의 많은 변화를 느끼고 있다가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회의는 이같은 ‘불변의 권력’ 때문이다. 검찰은 그같은 권력이 처놓은 보이지 않는 울타리 안에서만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실정법적 논리를 공격 무기로 삼아 전씨에 대한 재판의 ‘정치적 성격’을 부각시키려는 변호인쪽의 강변에 과연 검찰이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다.

진상 규명의 책임이 있는 곳으로 향한 메아리없는 외침에 많은 사람은 지쳐있거나 포기상태에 있다. 역사가 참으로 바로 세워지기 원하는 사회적 에너지가 우리에게는 축적돼 있지 못한 이유이다. 우리가 책임을 가진 쪽보다는 오히려 그럴 힘이 있는 곳으로 눈길을 돌릴 수 밖에 없는 것은 이같은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결과이다.

개혁의 선봉장이니 ‘전도사’니 하는 사람이 적지 않음에도 아직 우리 사회에는 개혁의 거점과 이를 공고히 해주는 진지가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언론이야말로 이같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대안을 찾아낼 수 있는 유력한 사회적 장치임에도 바로 그 언론이 지금 도마위에 올라 있는 형국이다.

힘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 현재의 대통령도 아닌 것 같다.

오랜 군사정권이 6.29로 후퇴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힘, 또 그 군사 정권이 야당의 일부와 손을 잡지 않을 수 없게 만든 힘, 현정권이 5.18특별법을 만들지 않으면 안되게 한 힘, 이같은 힘들은 우리 사회의 여러가지 변화의 심층에서 이를 가능케하는 커다란 물줄기로 작용해왔다. 이같은 힘이야말로 역사를 바로 세우는 동력이다. 우리의 눈길과 신뢰가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실질적 개혁의 내용을 담보할 수 있는 시민사회와 정치세력의 형성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게 하는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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