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가 현실이 됐다.

정부가 우호적인 여론조성을 위한 특혜성 사업으로 변질될 공산이 큰 종합편성채널 선정 시기를 내년 6월 지방선거 이후로 늦출 것이라는 업계의 예상이 들어맞았다.

종편의 인·허가권을 쥐고 있는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지난 22일 국회에 출석해 “내년 상반기 안에는 신규 종합편성채널 선정이 불가능하다”고 공식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종편 구비서류에 전년도 재무상황에 대한 평가가 들어있는데, 2009년도 재무상황은 3월 주주총회에서 의결돼야 하기 때문에 내년 상반기에 사업자를 선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최 위원장의 발언은 사실상 내년 6월 지방선거 이전에는 종편사업자 선정일정을 진행하지 않겠다는 공식입장을 밝힌 것으로, 그동안 모든 조직 역량을 투입해 종편사업자 진출을 준비해 온 조선·중앙·동아·매일경제 등 대형신문사들은 일정 연기로 인한 경제적인 손해를 피하기 어렵게 됐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연내 조속한 처리’에서 ‘내년 초 선정’으로 정부 입장이 바뀌었을 때만 하더라도 언짢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던 신문사 내부에서 공공연하게 정부에 대한 불만이 밖으로까지 흘러나오는 실정이다. 업계에서는 오죽하면 조선일보의 얼굴이라는 김대중 고문이 지난 11월 기명칼럼에서 “당국은 방송허가권을 쥐고 있을 수 있는 끝까지 끌고 가 실컷 ‘재미’를 본 뒤에 처리하려 한다는 소문도 있다. 어쩌면 내년 6월 지방선거가 끝난 뒤에나 방송권의 행방이 결정될 것이라는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며 ‘장난치지 말라’고 경고했겠느냐는 소리도 나온다.

   
   
 
최시중 방통위원장의 종편 선정 발언

▶ “오는 6월 국회에서 방송법이 개정되면 이를 바탕으로 이해관계자들의 종합적 의견 수렴과정을 거쳐 가능한 올해 12월까지 종합편성PP사업자를 선정할 계획” (5월8일)
▶ “8월 중에 종합편성·보도전문채널 승인관련 구체적 정책방안을 발표하겠다.” (7월26일)
▶ “종합편성채널 및 보도전문채널 사업자 선정은 헌법재판소 진행상황을 고려해서 결정할 것” (8월6일)
▶ “(헌재 판결 이후) 공은 이제 우리에게 넘어왔다. 서둘지도, 지체하지도 말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진행해 나가자.” (10월30일)
▶ “종편 구비서류에 전년도 재무상황에 대한 평가가 있는데 2009년도 재무상황은 3월 주주총회에서 의결돼야 하기 때문에 내년 상반기에는 불가능해 보인다.” (12월22일)

김 주필의 ‘예언’은 결과적으로 적중했다. 그러나 정부가 종편 사업자를 지방선거 이후로 미룰 것이라는 관측은 지난 10월 헌법재판소의 미디어법 결정 이후 방통위 안팎에서 끊임없이 제기돼왔던 내용이다.
방송통신업계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미디어법 판결과는 상관없이 종편 선정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기류가 방통위 안에 이미 기정사실로 퍼져있었다”며 “지방선거 이전 사업자를 선정할 경우 탈락하는 거대 신문사가 적으로 돌아설 텐데 부담되는 일을 스스로 만들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내년 지방선거는 현 정부에 대한 중간평가라는 의미와 맞물려 대통령선거의 전초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 자리를 야당에게 넘겨준다면 조기 레임덕과 함께 권력을 추종하는 후원세력이 급속하게 빠져나갈 가능성도 크다. 이런 중대한 정치적 상황에서 조중동 가운데 한 곳 이상을 탈락시킬 경우 돌아올 정치적 타격이 적지 않다는 판단이 종편 선정에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방통위가 헌재 판결 이후 일찌감치 종편 태스크포스(TF)팀을 야심차게 출범시켰으나 아직까지도 가장 기본적인 종편 갯수조차 명확하게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는 등 실무적인 작업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도 ‘정치적 입김’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세간의 추측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단 최 위원장은 ‘신문사와 대기업에 방송진출을 허용하는 종편 선정을 미끼로 지방선거에 악용하려 한다는 시각이 많다’는 민주당 박영선 의원의 지적에 “정정당당하지 않은 것은 하지 않겠다”고 일축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대선후보였던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마저 “종편이 일부 신문을 노예로 만들고 있다”고 지적할 정도로 의혹은 점점 불어나고 있다. 언론계에서도 ‘정치적 목적에 따라 선정 시기를 늦출 거라면 무엇 때문에 국회 충돌까지 무릅쓰며 미디어법을 날치기 통과시켰느냐’는 비판이 확산되고 있다.

경향신문은 지난 23일 사설 <미디어악법 종편, 이젠 정략적 악용인가>에서 “긴가민가했지만 방송통신정책의 주무 부처 수장인 최 위원장의 국회 발언으로 ‘탈락 신문사의 반발 역풍 때문에 내년 6월 지방선거 이전에 종편 사업자 선정은 어려울 것’이라는 세간의 추측은 결국 맞아 떨어진 셈”이라며 “(미디어법) 날치기 처리 당시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미디어법은 이명박 정부의 성공에 도움이 되는 법’이라고 했으니, 알듯 모를 듯했던 그 숨겨진 뜻이 하나둘씩 밝혀지고 있는 듯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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