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방송은 ‘신의 영향력’을 가졌다고 말해진다. 있는 것도 없는 것으로, 없는 것도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게 방송이다. 그런 점에서 방송사 사장은 ‘신의 손’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신화와 전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신화를 사실로 믿게 만들 수 있다. 80년 5월 광주를 ‘폭도에 의한 무법천지의 거리’로 만들 수도 있고, 그 광주를 ‘민주화의 성지’로 바꿀 수도 있다. 전두환씨를 ‘신의 섭리’에 의해 탄생한 ‘영도자’로 만들 수도 있고, ‘반란의 수괴’로 바꿔 버릴 수도 있다.

실제로 그랬다. 80년 이후 격동의 한국현대사에서 방송은 이 모든 것을 가상이 아닌 생생한 현실로 그려냈다. 한 인물을 위해 ‘신화’를 조작해내고 국민들에게 그 신화를 ‘사실’로 믿게 만들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방송사 사장이 있었다. 역대 방송사사장은 감히 신의 영역에 도전했고, 그리고 성공했다.

방송사사장 임명은 청와대가 전권을 행사했다. 언론인으로서의 능력과 소신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권에 대한 충성도가 유일한 기준이었다. 그것이 한국방송의 불행이자 비극이다. 그 불행은 개혁이 유행어가 된 문민시대에도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MBC노조의 파업은 그것이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임을 웅변한다.

70년이후 7명의 MBC 사장중 2명이 청와대 대변인 출신(이웅희, 황선필)이다. 1명은 문공부 장관(이진희)을 지냈다. 2명은 유정회의원, 민정당의원 출신(이환의, 김영수)이다. KBS는 역대사장 7명중 2명이 청와대 대변인(정구호, 서기원)을 지냈다.

1명이 문공부장관(이원홍)으로 입각했고 3명이 문공부 차관 출신(홍경모, 최세경, 박현태)이다. 직업관료 출신인 홍경모씨(KBS 초대사장)와 흥사단이사장을 지낸 서영훈씨, 전남지사 재임중 MBC 사장에 임명된 이환의씨를 빼고는 모두가 언론인 출신이다. 언론인 출신들이 그들을 키워준 언론을 유린했던 것이다.

전문방송인 출신은 89년부터 93년까지 MBC 사장을 지낸 최창봉씨와 최근 노조의 연임반대 파업으로 관심의 표적이 되고 있는 강성구씨 정도다. 그러나 최씨와 강씨도 “방송출신이 더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권력의 외풍에 힘없이 무너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역대 방송사사장중 가장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는 이원홍, 이진희씨다. 80년 7월부터 85년 2월까지 KBS 사장을 지낸 이원홍씨는 KBS 입성때 ‘죽음의 사자’로 불릴 만큼 공포의 상징이었다. 신군부의 뜻에 따라 KBS내 양심적인 언론인들을 추방했다.

85년 2·12 총선보도로 절정을 이룬 그의 불공정방송은 ‘KBS 시청료 거부운동’이라는 전국민적 저항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KBS 재직시절 ‘왕PD’ ‘노예선의 선장’ ‘네로황제’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 사원들이 보는 앞에서 국장의 뺨을 때리기도 했으며, 폭언은 물론 재떨이를 던지는 등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의 이같은 성격은 ‘구두발령’이라는 일화를 남긴다. 재임중인 어느 일요일, 불시에 보도국을 방문해 당시 부국장 김모씨를 오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정치부장 이모씨와 즉석에서 자리를 맞바꾸도록 한 것이다.

80년 8월22일 전두환씨의 대장 전역일에 KBS는 특집방송을 내보낸다. 그가 취임한지 한달 여만의 일이다. “민주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우리의 신념이 새로운 지도자의 뜻과 어울려 하나의 깃발, 하나의 강산, 하나의 마음, 하나의 나라로 뭉치는 / 오랜 고난의 운명을 헤치고 우리는 다시 찬란한 미래앞에 우뚝 서리라” 이씨의 이런 방송기조는 그의 재임기간 내내 계속된다.

이진희씨는 5공출범과 함께 MBC 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서울신문 주필시절인 80년 4월21일 ‘역사의 무대는 바뀌고 있다’는 시론을 통해 “80년대 이후의 새시대가 함축하는 의미와 민족사적 진로의 향방, 그리고 이를 주도할 새 엘리트층의 등장’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 신국부의 등장을 부추켰다.

이 시론 덕분에 그는 전두환보안사령관과 독대하는 기회를 갖게되고 국가보위 입법회의에도 참여했다. 이씨는 문화방송 사장 취임사에서 새시대 정립을 위해 언론인은 국가관이 투철해야 하며 체제의 수호자가 돼야 한다고 선언, 간부직원 1백77명의 사표를 제출받아 다음날 41명을 의원면직시켰다. 다른 언론사에서 언론인 강제해직을 단행하기 전이었다.

또 ‘새시대 새마을’ ‘국군과의 대화’ 등 청와대용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이른바 ‘땡전뉴스’를 연 장본인이기도 하다. 80년 8월15일 그는 신군부 집권의 당위성을 이렇게 홍보한다. “전장군께서는 새 시대를 영도해야 할 역사적 책무를 싫든좋든 맡으셔야 할 위치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MBC는 최규하 당시 대통령이 물러나지 않았음에도 ‘새 영도자를 중심으로 굳게 뭉치자’는 자막을 드라마 중간에 자주 내보내기도 했다.

이 두사람은 5공기간 내내 충성경쟁을 펼치며 한국방송을 왜곡과 굴절의 어두운 터널로 몰고 갔다. 그 대가로 두사람 모두 문공부장관을 지냈다. 이들은 악명높은 ‘보도지침’을 통해 전체 언론사의 ‘편집국장’ 노릇을 했다. 심지어 이원홍씨는 자신의 연설치사 담화를 눈에 띄게 보도하라는 지침을 내려보내기도 했다.
경향신문사장, 청와대 대변인을 거쳐 87년 KBS 사장에 부임한 정구호씨도 권력지향적 언론인의 전형으로 꼽힌다. 그는 ‘88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한 준비연구’라는 5공의 영구집권 음모 계획서를 작성해 물의를 빚었다.

90년 4월 KBS 사장에 취임한 서기원씨는 정부의 방송통제 기도와 방송사 직원들의 방송독립 확보라는 대결구도속에서 파란의 세월을 보냈다. ‘정권의 낙점’이라는 그간의 방송사사장 인사 관행에 사원들이 브레이크를 걸었고 그는 방송사에 대한 사상초유의 경찰투입이 이루어진 날, 취임식을 갖는다.

이들 낙하산 사장들과 분명하게 구별되는 이가 서영훈씨다. 흥사단 이사장을 지낸 시민운동가 출신으로 KBS사장에 임명된 그는 광주문제의 프로그램화와 ‘인권보고’ ‘정경유착’의 프로를 만드는 등 개혁을 바라는 국민의 요구를 잠시나마 방송에 담아냈다. 그러나 결국 이런 성향이 문제가 돼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중도하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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