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KBS 특집부 기자들은 일요일에 느긋하게 쉬고 있다가 호출기로 연락을 받고 회사에 출근했다. 그리고 역사바로세우기와 관련한 보도특집을 만들었다. 한 기자는 “3-4시간만에 만든 그야말로 날탕 특집이었다”고 말했다.

전혀 계획이 없던 이 특집이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것은 전날 SBS가 8시뉴스 첫머리에 역사바로세우기 기획을 3-4꼭지 내보낸 것이 발단이다. 김영삼대통령이 이를 보고 매우 흐뭇해하며 “KBS, MBC는 왜 저런걸 안하지”라고 말한 것이 회사 고위층에 전달됐고 이것이 느닷없는 특집편성으로 연결됐다는 것이 기자들이 전언이다.

실제 김대통령이 이 말을 했는지의 여부와 그것이 어떤 경로로 KBS에 전달되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문제는 취재과정에서 만난 대부분의 기자들이 이를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뉴스의 상당부분이 ‘외풍’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그것이 대부분 수용된다고 기자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한 기자는 “대통령 동정은 하나도 빼뜨려서는 안된다” “7시나 마감뉴스가 아닌 주요뉴스 시간대(9시뉴스)에 보도해야 한다” “뉴스말미가 아닌 중간 이전에 집어넣어야 한다”가 불문율로 지켜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뉴스를 봐라. 이 원칙에서 벗어난 것이 하나도 없다” 며 “데스크가 특별히 지시하지 않아도 그렇게 하는게 관행으로 자라잡았다”고 밝혔다.

비판 실종 - 미화 일색

MBC도 마찬가지다. 사회부에서 잔뼈가 굵은 한 기자는 “고발이나 비판기사는 열심히 써봤자 손해만 본다”고 말했다. 데스크가 ‘소리나는’ 기사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이런 기사가 나오면 외부에서 곧바로 연락이 오고, 회사 고위간부도 “뭐하러 긁어부스럼을 만드느냐”고 질책한다.

그 뒤치닥거리가 만만치않다. 강성구사장은 노골적으로 “갈등을 증폭시키는 뉴스는 지양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갈등을 증폭시키는’ 고발이나 폭로기사가 대접을 받을리 없다. 강사장 취임후에는 ‘00대학 인맥’이 거론될 정도로 인사도 무질서해졌다. 그는 “발로 뛰는 시간보다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며 “그래도 무능하다거나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지 않는걸 보면 이게 몸보신엔 좋은 것 같다”고 웃었다.

그렇게 방송은 흔들리고 있었다. 침묵과 자조의 ‘이상기류’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그 이상기류에 밀려 한국방송은 ‘원점으로 회귀’하고 있다.

그 원인과 책임은 상당부분은 김영삼정부의 ‘언론정치’에서 찾아진다. 김영삼정부는 언론과 검찰을 체제유지의 기둥으로 삼고 있다. 그중에서도 방송을 가장 효과적인 홍보수단으로 삼고 있다. 개혁의 손길이 못미쳐서가 아니라 개혁을 할 뜻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최근 KBS와 MBC가 홍두표사장과 강성구사장을 연임시킨 것과 관련, 정부 개입 여부를 두고 이런저런 말이 무성하다. 정부 개입의 구체적 증거가 밝혀진 것은 없다. 반면 한점 의혹없이 투명하게 이루어졌다는 반증도 없다.

MBC의 경우 방문진 이사들중 일부가 “사전각본대로 진행된다고 느꼈다” “참담하다.” “훗날 밝힐 기회가 있을 것이다”고 괴로운 심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강사장의 강력한 경합자중의 한 사람은 방문진의 사장 결정이 있기 한참전에 “탈락했다”는 ‘사전통보’를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KBS의 경우 유세준 공보처차관이 KBS이사회 김태길이사장에게 “사장 선임을 선거뒤로 미뤄줄 수 없겠느냐”고 요청했다. 이같은 정황은 정부가 방송사 사장 임명과정에서 무엇인가를 하려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선거후로 선임을 연기해달라”고 한 것은 이번 총선에서 방송을 통해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 ‘무엇’에 대해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족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좌지우지

지난달 26일 KBS MBC 양방송사는 ‘세기의 재판’으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은 전두환, 노태우씨의 재판소식을 9시 뉴스에서 뒤로 밀어내고 김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을 머릿기사로 보도했다. KBS는 방송시작 직전까지 전두환, 노태우씨 재판이 머릿기사로 잡혀있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MBC는 다음날 미국이 광주 유혈진압을 비밀리에 사전승인한 사실이 밝혀졌다는 뉴스를 7번째 아이템으로 보도했다. 당초 이 기사는 두꼭지로 잡혀있었느나 김종오보도국장의 지시로 한꼭지로 줄어들었다. 김국장은 자료그림이 없어서 축소했다고 해명했으나 영상취재팀은 그림이 있었다고 반박했다.

김대통령이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늘리겠다고 발표하자 이미 몇년전부터 진행중인 간척사업을 최근에 시작한 것처럼 머릿기사로 보도한 사례도 있다.

이런 불공정보도가 모두 외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거꾸로인 경우가 더 많다. 정치부 출입만 10여년째인 한 방송사기자는 “정치권의 요구가 있기전에 먼저 눈치를 채고 몸을 숙인다”고 말했다. 최근 김대통령 동정의 확대보도는 ‘알아서 기는’ 대표적 기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사는 중요하다. ‘알아서 할 만한’ 인물을 내려 보내야 되기 때문이다.

뉴스를 통해 청와대에 잘 보이기 위한 ‘물밑경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최근의 불공정방송은 사장 자리를 놓고 회사 고위간부들이 암투를 벌인 것도 큰 몫을 차지했다는 분석이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이 분석에 고개를 끄덕인다.

보도국 각 부서장들이 모이는 편집회의도 자율성을 잃은 ‘보고회’로 전락했다. KBS의 한 기자는 “지난해 KBS 뉴스가 MBC를 누르고 잘 나갈때만 해도 정부 홍보성 기사가 나가면 이러면 안된다는 말도 나오곤 했으나 최근에는 거의 나오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편집회의 분위기를 전했다. 최근 사장선임 문제가 걸리면서는 일부 부장들이 기자들에게 “욕을 먹더라도 총선까지는 그냥 가고 총선후에 제대로 하자”는 말을 노골적으로 건네기도 한다.

대통령 동정이나 정부 선심성 공약이 많아진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정당관련 보도는 양적인 균형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기술을 부릴 여지가 적다. 그러나 대통령이나 정부는 상대가 없어서 편하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다. 예전에도 그랬다. 중요한 것은 변화와 개선의 흐름에서 퇴행의 물결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눈치보던 편파’에서 ‘앞뒤 안가리는 왜곡’으로 가고 있다. 방송의 시침은 거꾸로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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