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대 총선을 앞두고 각 당이 공천작업을 끝마치는 등 본격적인 선거전에 나서고 있으나 TV토론 등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비단 토론 뿐만아니다. 일반 뉴스 프로외의 선거관련 기획프로도 별반 눈에 띄지 않는다.

지자제 선거를 기점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미디어정치가 이번 선거에선 현격히 퇴조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대선이나 지자제 선거와 달리 전국적인 공통의 관심사를 갖기 어려운 국회의원 선거의 성격이 이러한 미디어 정치의 퇴조 현상을 불러 일으켰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더 깊게 들여다보면 ‘선거의 성격’탓 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의 이해부족과 제약 투성이인 관련 법규가 원천적으로 미디어정치의 활성화를 ‘봉쇄’한 측면이 강하다.

지난 6·27 지자제 선거만해도 “TV가 안방정치를 열어젖혔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만큼 한국사회에서 ‘미디어 정치’의 가능성을 확인시킨 일대 전기로 평가된다. 서울시장을 비롯한 각 지역별 광역 단체장 후보자들 대부분이 TV토론을 벌였다.

MBC가 서울시장 토론회를 두차례 갖는등 모두 20여차례의 크고 작은 토론프로가 방송됐다. 이 과정에서 지역방송의 역할이 부각되기도 했다. 직접적인 후보검증이라는 기회를 가졌던 유권자들의 반응도 좋았다. 그러나 15대 총선은 지자제 선거와 비교하면 TV활용도가 현저하게 낮은 모습이다.

현재 선거관련 독자적인 토론프로는 SBS가 15일 ‘시사포커스’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각 당 대변인들간의 설전을 벌인 것이 그나마 손 꼽힐 정도다. ‘3김 청산’문제등을 둘러싸고 거센 입심 대결이 벌어진 이 프로는 ‘신대변인 문화’가 주제였음에도 토론이 너무 격렬했던 탓에 일부 내용이 삭제될 정도였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방송이 할 수 있는 것은 크게 세가지. TV토론과 경력방송,연설방송 등이다. 대통령 선거와 지자제 선거에선 허용됐던 후보자 TV광고는 할 수 없도록 선거법에 명시돼 있다.

이 가운데 경력방송은 KBS의 의무조항이다. KBS는 선거운동기간중에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시설을 이용해 후보자마다 매회 1분이내의 범위안에서 후보자의 주요 경력을 2회 이상 내보낼 수 있다. 이에 비해 MBC는 선택사항일뿐이다. 연설방송의 경우는 전국구 후보에 한해 두번에 걸쳐 각각 10분이내에서 방송을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TV토론을 제외하고는 극히 제한적인 형태로 선거과정에 참여할수 있을 뿐이다. TV토론은 횟수에 상관 없이 각 방송사가 자율적으로 개최한다.

현재 각 방송사들은 TV토론이 이루어지지 않는 책임을 정치권에 돌리고 있다. 각 정당들의 정치적 입장 차이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TV토론에 가장 적극적인 추진 의사를 보여온 KBS의 경우 선거대책위의 장 등이 참여한 중량급 토론회는 무산됐다는 판단아래 이를 각 당에 16일 통보하기도 했다.

정치권은 대부분 TV토론의 필요성과 당위성은 인정하지만 참여자의 격등 세부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이해관계를 달리한다. 야 3당이 공히 선대위장간의 무조건적인 토론회 개최를 주장하고 있는데 비해 여당인 신한국당은 “지역구 후보인 선대위장들이 토론에 나설 경우 원천적으로 자신들이 출마한 지역구 선거 당락에 영향을 미칠수 있다”며 “야당 총재와의 공개 토론회”를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야 3당은 8일 이회창 신한국당 선대위의장과 야당 총재간의 토론은 말도 안되는 얘기라며 일축, TV토론은 무산위기에 처해 있다.

정치권의 이러한 공방이 미디어정치를 가로막는 우선적인 원인이라면 공정보도 시비를 의식한 각 방송사의 몸사리기도 극복해야할 과제로 손꼽힌다. 방송관계자들은 지자제 선거나 대선과는 달리 총선의 경우 각 지역별로 후보자간의 지지 편차가 심하다보니 각 정당을 모두 만족시키는 형식의 선거방송을 하기 어렵다는 반응들을 보이고 있다.

지역별 후보자간의 토론회를 계획해도 마찬가지다. 과연 어떤 지역구를 선택해야하는지도 고민거리 일 뿐만아니라 4당이 공평한 조건에서 박빙의 싸움을 벌이는 곳을 찾기도 어렵다. 더구나 현행 선거법엔 방송사가 우세,열세 등 주관적인 표현을 사용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CBS ‘시사자키’의 경우 정치평론가를 동원해 각 지역별 판세분석을 진행하다 방송위로부터 사과방송 명령을 받고 판세분석을 중단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토론자로 참석한 한 노동단체 관계자가 대담도중 갑자기 특정 후보를 지지한다고 발언,방송위의 경고를 받았다.

CBS의 한 관계자는 “현행 선거법은 방송사의 적극적인 선거보도를 원천적으로 제약하는 측면이 많다”며 “일단 방송사의 자체 심의 규정을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특히 “선거와 관련한 방송내용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는 당사자들은 반론권을 얼마든지 부여해 줄수 있다”고 전제한후 “유용한 정보제공과 형평성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면 각 방송사의 자율성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서울대 양승목교수(언론학)도 “ 총선과정에서 미디어정치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활성화될수 있도록 방송사나 정치권이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며 “불필요한 정치적 비용을 줄여 나가기 위해서도 TV토론등 미디어의 기능을 극대화해야 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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