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9월. 반전운동을 주도했던 신세대 무정부주의단체인 이플은 기술미국협회라는 뜻의 TAP(Technical America Party)라는 이름으로 바꿨다.

개명과 함께 이들은 기관지를 통해 “TAP의 목표는 인류를 위한 기술정보를 제공하는 일”이라며 인류복지를 위해 해커들의 결집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같은 주장에서 느낄 수 있듯 초기의 해커들은 이유없이 전화를 공짜로 쓴다거나 시스템 파괴를 목적으로 해킹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동일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컴퓨터광들이 모여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거나 인류복지를 위한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와 때를 맞춰 지구촌 곳곳에서 컴퓨터 아나키스트들의 단체가 잇따라 탄생했다. 북미는 물론 유럽지역에서도 다양한 모습으로 무정부주의자들이 단체를 결성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해커집단은 클로드(CLODO). 컴퓨터타도·파괴협회라는 뜻의 이 단체는 통신망에 연결된 컴퓨터 시스템을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을 감행해야 할 책임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사실을 반영하듯 프랑스에서는 1979년과 1980년 사이에 해커들이 회사 등에 침입하고, 테이프나 디스크를 훔친 사건이 10여건에 달했다. 그들은 새로운 통신이나 정보기술로 얻어지는 지식이나 힘, 이익이 소수에게 편중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같은 컴퓨터 아나키스트로 자처하는 해커그룹중 81년에 탄생된 독일의 ‘카오스 그룹’은 다양한 사건으로 세계에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카오스란 이름이다. 현실사회가 아직 컴퓨터를 도입해 쓰기에는 부족한 것은 물론 자칫 잘못하면 혼란(카오스)이 뒤따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발기선언문은 단순한 취미서클이라기보다는 정치선언문과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정보사회로 나아가는데 전세계와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인권이 필요하다. 인간사회나 개인에 대해 기술적 영향을 미치는 정보, 국경이 없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새로운 지식이나 정보를 만들어 대중에 알려야 한다.”

카오스그룹의 주장은 해킹이 우리 시대 필연적인 산물이라는 것이다. 발기문 처럼 컴퓨터기술의 발전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지고 있지만 허점은 끊임없이 발견되고 있다. 아직 카오스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컴퓨터 시스템의 취약성은 하루라도 빨리 아는 것이 더욱 효율적인 시스템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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