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 수요일 오전 10시 반 정부종합청사 10층 복도를 뒤흔드는 소리가 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기독교방송 보도국 정치부 박종률기자(31). 과천에 있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취재를 위해 총리실 기자실을 나오던 박기자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걸어오던 연합통신의 성선배를 보고 두발을 모은채 거수경례를 한다. 성선배도 장난스레 손을 들어 인사를 받는 시늉을 한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동안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14대 총선이 박기자에게 가장 확실하게 다가온 것은 갑자기 떠맡겨진 출입처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통해서다. 아직 선거기간에 들어서지 않았기 때문에 선관위에서 바쁜 일은 없지만 부담감은 광화문에서 과천 제2청사로 가는 길의 중압감에서부터 온다.

오늘 정부 보고는 별로 큰 건이 없다. 그래서 얼른 ‘공무원 명예퇴직’과 ‘공무원 컴퓨터 경진대회’건을 송고하고 과천으로 가는 것이다.

박기자는 종합청사 내에 산재돼 있는 총리실과 각 부처에서 나오는 뉴스를 담당하고 있다. 따라서 뉴스의 대부분은 공보관 들의 브리핑을 통해 나온다. 특종도 없고 낙종도 없는 것이 이곳 출입기자들의 특징이다. 박기자가 지난해 딴 석사학위 주제가 ‘기자단 운영시스템의 개선방안’인데 그 현장에 있다는 점이 항상 마음에 걸린다.

이곳 출입기자들은 경찰기자나 정당출입기자처럼 사회비판기능을 수행하기 보다는 국민들의 알권리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하는 곳이라는 생각을 한다. 법이나 행정사안 등, 정부의 흐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분야에 대한 공부를 해야만 바른 정보전달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박기자의 하루는 총리실 기자실에서 시작된다. 연희동 집에서 기자실로 직접 출근해 자료를 정리해 오전 8시 반에 데스크에게 통신으로 그날의 주요기사를 송고한다. 그러면 정치부장은 9시 부장단 회의를 통해 결정된 사안을 전해주고, 하루의 취재가 그 안을 중심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행정부에서의 큰 건은 대부분 국무회의가 있는 화요일에 나온다. 어제도 ‘울산광역시 승격’이나 ‘방송법 재상정’등을 담은 1백50건의 올 행정부 입법안과 ASEM준비위원회 발족 같은 중요한 뉴스들이 나왔다.

국무회의에서 나오는 이수성총리와도 잠시 인사를 했다. “금성이 엘지가 되고, 수성이 총리가 된 것이 스티브 호킹이 뽑은 올해의 빅뉴스다”라는 농담으로 박기자는 자신을 총리에게 처음 각인시켰다. 평소에 이총리는 권위주의적인 구석이 없는 소신있는 총리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전에 10일 동안이나 감정싸움을 한적도 있었다.

어제는 준비위원회 조직 과정에서 부위원장의 숫자로 장난을 친 외무부안에 대해 비난하는 칼럼도 썼다. 하지만 오늘은 어제의 수선함과는 달리 조용하다.

그래서 박기자는 인터뷰 섭외와 ‘의정보고서’ 건을 취재하기 위해 일찍 과천으로 향한 것이다. 선관위에 사무실 2층 기자실에 들어가니 아직 본격적인 선거기간이 아닌 탓인지 썰렁하다. 자리에 앉아서 임좌순 선거관리실장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자리에 없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가장 바쁜 사람중에 하나일 것이다. 생각을 바꾸어 ‘의정보고서’건을 확인하기 위해 김호열 선관위 공보관리관의 방을 찾는다. 방에는 이미 경향신문의 이병광기자가 와 있다. ‘의정보고서’를 취재하는 중에 이야기는 선관위의 어려움으로 흐른다. 여기서 박기자는 바로 내일기사의 중심내용을 잡아간다.

“검찰에서 기소를 하면 법원은 1심에서 49%밖에 인정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처음 고발인원의 10분의 1수준으로 떨어집니다.” 김관리관의 하소연을 이해한다. 그래서 박기자는 허위재산 신고와 의정보고서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난 것을 중심으로 내일 아침에 쓸 뉴스를 작성하기로 하고 김관리관에게서 멘트를 딴다.

‘그림’ 연상되게 뉴스 전달 노력

기독교방송의 주요 뉴스는 하루에 다섯 차례가 있다. 박기자는 청취자의 숫자는 작지만 여론주도층이 많이 듣는다는 점과 오랜 동안 올곧은 보도로 믿음을 쌓아온 자사의 뉴스에 자부심이 많다. 특히 기독교방송은 ‘기자의 창’이나 ‘정가산책’(칼럼), ‘기자수첩’(가십)을 통해 기자의 주관을 펼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기사는 데스크에게 통신으로 점검받고, 전화로 현장에서 직접 방송한다.

박기자는 공직자의 재산신고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문득 93년 ‘재산비리 공개’ 취재가 기억났다. 사회부 시절 선배의 지휘 아래 공직자의 재산비리를 파기 위해 지역을 돌아다니며 일일이 장부를 대조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결국 이 보도로 팀은 ‘이달의 기자상’과 ‘한국기자상’을 타는 영광을 누렸고, 당사자는 사정의 철퇴를 맞았다. 그런데 요즘 그들이 다시 정가에 복귀하는 것을 보면 찹찹한 심정을 느끼곤 한다.

어느새 점심 시간이 됐다. 경향의 이기자와 문화의 이미숙기자와 같이 구내식당으로 향한다. 식당에 내려가서 줄을 서려는데 인터뷰를 부탁할

임좌순 선거관리실장이 식당에 내려온다. 인터뷰를 요청하자 임실장은 흔쾌히 요구에 답한다. 오늘은 재수가 좋다. 일이 제법 쉽게 풀리는 것 같다.

“아참, 박기자 식사 후에 나 지하철까지 태워줄 수 있어.” 아쉬운 소리 잘 안하는 문화의 이기자가 부탁을 한다. 식사 후 산책 겸이라는 생각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준다. 선관위에서 지하철역까지는 꽤 먼 거리인데, 노트북에 서류가방까지 들고 갈 이기자를 혼자 보낼 수는 없다. 더구나 이기자는 정당 출입시에 고생을 같이 한 때문인지 정이 간다.

식사 후에 지하철역까지 태워다주고 주차장에서 담배를 한대 물었다. 봄을 느껴보기 위한 마음의 요구에 이렇게 나마 달래본다. 담배가 다 타들어갈 무렵 허리에서 호출기의 진동이 느껴진다. 무심결에 들여다본다.

“낯익은 번호다. 누구지”하는 생각을 하고 로비로 들어갈때, 형의 출입처라는 것이 생각났다. 형인 박종권 중앙일보 수도권팀 기자는 박기자의 언론계 선배이다. 형은 부천에 살지만 둘다 너무 바쁘니 얼굴 볼 겨를이 거의 없다. “형이 왠 일로 전화를 했지”하는 생각에 잰 걸음으로 기자실로 향한다.

“별일 없지”하고 형은 대뜸 묻는다. 형 다운 생각이다. “아 안부전화구나”하는 생각에 안도의 숨을 쉰다. 이런저런 것을 이야기하다가 “시골에 안 내려 가냐”고 묻는다. 물론 아직 특별히 날짜를 잡아볼 여유가 없다. 두 아들과 같이 하는 술자리가 아버님은 그리우실텐데 그게 쉽지 않은 것이 언론계의 일상이다. 박기자의 집은 현역 3부자 언론인 가족이다. 아버님은 전북일보의 상임논설고문으로 계시는 박규덕씨다. 5공 초기 “군대는 땔감도 쓸 수 없고, 재목으로도 쓸 수 없는 탱자나무와 같은 것이니, 울타리의 역할만을 해야한다”는 글로 모진 고초를 당하시고 지금도 당시의 흔적을 등에 상처로 가지고 계신다.

‘목소리 가꾸기’에도 신경

오후 4시에 ‘의정보고서 탈법사례 통계’가 나온다. 그간에 밤 뉴스와 내일 아침 뉴스의 기사를 작성해야한다. 예상했던대로 4시에 나온 결과를 보니 현역의원 절반 가량이 규정을 어겨가며 의정보고서를 작성했다. 결국 정상적으로 의정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이 우스운 꼴이 되고 만다. “이러지 않아야 하는데”하는 생각을 하지만, 이미 이런 결과에도 익숙해진 자신을 느낀다. 이런 일들이 분노나 허탈감으로 작용하던 때는 이미 지났다.

문화일보 이기자가 자료를 추가로 부탁했기 때문에 한부를 더 챙겨온다. 이기자의 자료는 팩스에 올려 놓고, 회사로 출발한다. 내일 아침에 들어갈 뉴스에는 오전에 녹음했던 김관리관의 멘트가 들어가야하기 때문이다. 회사로 들어가 이부분을 릴 테이프로 편집을 해야한다. 목동으로 가는 길도 오늘은 의외로 쉽게 빠진다. 오늘은 친구인 KBS의 정해룡PD와 술을 한잔 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다. 평소에 출입처 사람들과 술자리를 많이 하기도 하지만 왠지 업무가 중간에 끼어선지 친해지기는 쉽지 않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그 섬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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