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전은 ‘말 싸움’이 기본이다. 쏟아지는 말들은 언론에 의해 여과되고 추려진다. 언론이 생명력을 부여하지 않으면 사장된다. 언론다루기에 따라 선거승패의 명암이 엇갈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선거전에 언론로비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그런점에서 당연하다. 후보자들의 ‘언론사냥’ 현장을 들여다 보자.

성향따라 강·온전략 구사

“과거 경력에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 공천을 받았다는 지적들이 많습니다. 5공 출범당시 언론대책반장을 역임한 이상재씨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지요.”

“솔직히 이상재씨 같은 사람이 당선이 되겠습니까.”

지난 3월 5일 관훈클럽 토론회장. 김윤환 신한국당 대표가 한 참석자 질문에 대해 내 놓은 답변이다. 집권 당 대표로서 자신이 소속한 당 후보를 형편없이 깍아내린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신한국당의 정체성을 부인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공개적인 토론회 석상에서 결코 당 대표가 해선 안될 말이었다.

가십성 화제로 문제 삼을 법한 이 발언은 그러나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다. 김 대표 비서진들이 취재기자들에게 보도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 한 것이다. 비서진들은 일일히 기자들을 찾아다니며 해당 발언 보도저지에 나섰다. 김 대표는 언론을 통한 언론플레이에 능하다. 이른바 언론을 통해 치고 빠지는 일이 다반사다. 가깝게 지내는 기자들도 적지 않다. 허주계로 분류되는 기자들도 상당수다. 언론인 출신으로 언론계 내부의 거부감도 다른 의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하다. 따라서 이런 정도의 언론로비는 식은 죽 먹기다.

김 대표의 경우가 읍소형 언론로비라면 얼마전 국민회의 이해찬 선거대책위 기획단장이 한 주간신문 기자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닥달’한 것은 강압형에 가깝다.

이 의원은 기자간담회 도중 최근 유준상 의원의 공천헌금 주장을 폭로한 모 주간지 기자에게 대 놓고 싫은 소리를 했다. “제대로 검증되지도 않은 사실을 막 써도 되느냐”며 “기본이 안 돼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유준상 의원의 폭로 보도는 국민회의 당직자들, 특히 김대중 총재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이 의원은 기자들을 비교적 진지하게 대하는 편이다. 송곳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언론비판도 날카롭다.

같은 당 소속인 김상현 의원은 이 의원과 정 반대다. 기자들을 끊임없이 재미있게 하는 것이 그의 장기이다. 지난해 국정감사 당시 김의원은 당 소속 출입기자들에게 여성용 잠옷을 선물했다. “오랫만에 마누라에게 점수 좀 따라”는 당부와 함께. 여수 시 프린스호 뇌물 수수 사건으로 공천 대열에서 탈락한 신순범 의원의 인기도 김상현 의원에 못지 않았다. 기자들과 술 자리를 함께하면 신 의원의 구수한 입담은 넋을 잃게한다는게 기자들의 전언이다. 신 의원의 판소리 한번 듣지 못하고 출입기자를 마감한다면 ‘불행한 기자’라는 격언이 나돌 정도였다.

최근 신한국당에 입당한 박찬종 선대위 수도권 본부장은 또 다른 측면에서 기자들에게 인기가 높다. 기자들에게 ‘영양가’있는 기사 거리를 자주 제공한다. 쇼에 능하다는 지적대로 뉴스를 만드는데 능하다. 무엇이 기사가 되는지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는 평이다. 최근에도 선거후 개혁세력 대결집론을 역설하며 기자들을 기쁘게 했다. 14대 등원 초기에는 자전거 출퇴근으로, 이후에는 서울시장 출마 여부, 신한국당 입당 문제 등을 둘러싸고 끊임 없이 ‘일용할 양식’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를 좋아하는 기자들은 별로 없다. 거만해 보인다는 것이다.

신한국당은 김 대표를 비롯 이회창 선대위장,박찬종 선대위 수도권 본부장간에 대권을 겨냥한 ‘신경전’이 극심해지면서 당 보다는 개인적인 이미지 고양을 노린 측근인사들의 언론플레이가 더 치열하다.

개인 대변인 둔 후보자도


선거가 시작되면 후보자 개인 차원의 언론로비는 훨씬 개방적으로 진행된다. 언론로비라기보단 홍보에 가깝다. 지난 3월초 독도문제로 한창 시끄러울때이다. 충청지역에서 지역구 활동에 한창이던 민주당 김모의원이 돌연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평소 초등학교 개명등 독립투사의 후손임을 자임하며 일제잔재 청산문제에 적지 않은 관심을 보여온 이 의원은 당일 아침차로 도착해 항일 독립운동 유관단체 회원들을 대동하고 기자실에 나타났다. “자신의 전공과목인데 그냥 있을 수 없어서 왔다”는게 해당의원의 변이었다. 이 의원은 “일 총리의 독도 망언을 규탄한다”는 성명을 낭독하고 당일밤 기차로 다시 지역구로 향했다. 사진 한장 신문에 나오는 것이 명함 몇 천장 돌리는 것보다 낫다는 정치권의 오랜 격언을 상기시키는 일화이다.

선거가 시작되기전에는 각개격파식의 언론로비와 얼굴익히기가 성황을 이룬다. 이번 선거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말과 올해초를 전후로 언론사 정치부 데스크들이나 기자들에겐 정치인들의 면담 요청이 줄을 이었다.

정치부 기자들 개인이력을 탐문하는 의원 비서진들도 눈에 자주 띄었다. 신문사가 밀집해 있는 광화문 일대 고급 음식점엔 정치인들과 언론인들간의 회동이 심심치 않게 목격됐다. 민주당 한 의원 보좌관은 “선거전 종합일간지 정치부장 가운데 한둘을 빼고는 다 만났다. 학연을 내세우는 것이 가장 편했다. 술자리를 가진 경우도 상당수였다”고 밝혔다.

각 당의 공천작업이 한창일때는 더 했다. 소속 당 출입기자를 찾는 의원들이 부지기수였다. 영향력이 큰 매체일수록 이러한 로비가 쏟아진다. 특히 지난해 국감당시 국민회의의 경우 김 총재가 국감 성적을 토대로 공천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발언한 이후 의원들의 언론로비는 정상적인 수준을 넘어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기자는 “저녁 늦게 자신의 사무실로 찾아온 의원도 있었다”고 소개했다.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이 경우 자신의 지면에 돋보이게 다뤄주고 싶어도 주위의 눈을 의식해 뜻대로 하지 못한다. 오히려 역효과만 나는 셈이다. 사무실까지 찾아왔던 의원도 결국 공천에서 탈락했다. 의정활동에 문제가 많은 의원일수록 ‘언론밝힘’ 증세가 심하다. ‘언론타기’로 자신의 무능을 커버해 보겠다는 의욕이 남다른 것이다.

이번 선거 홍보전에서 새로운 현상중의 하나는 개인 대변인을 둔 후보자들이 상당수에 달한 다는 점이다. 노무현(민주당 서울 종로), 이성헌(신한국당 서울 서대문 갑), 김근태(국민회의 도봉갑), 장일(자민련 도봉을), 남칠우(무소속 대구 수성을) 후보등이 이런 경우다. 이들은 대변인을 따로두고 매일 후보와 관련한 보도자료를 언론사에 재공하는 등 얼굴알리기에 열성을 기울이고 있다.

‘당선확신’ 언론 냉대도

후보자의 맹렬한 언론홍보로 엉터리 정보가 지면에 실리는 수도 있다. 가령 관악 지역에 출마한 한 후보자의 경우 대학 시절 잠깐 동안 학생운동에 몸 담았던 것이 ‘학생운동의 대부’인양 보도됐다. 그러나 이 후보자의 전력을 아는 사람들은 ‘5.6공 시절 군부정권의 외곽조직’에서 활동했다고 증언한다. 이러한 사례는 부지기수다.

자신의 상품력을 과대 포장하는 정치인들과 기자들간에 밀고 당기는 신경전이 끊이지 않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선거전이 시작됐는데도 기자들이 후보자들로부터 별반 대접을 받지 못하는 지역도 있다. 광주·전남 지역이 그렇다. 이 지역은 말 그대로 국민회의 공천은 곧 당선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곳이다. 그러다보니 국민회의 후보자들의 태도가 고압적이기 일쑤다. 심지어 자신에게 불리한 언론보도가 나오면 경고성 보도자료를 돌리는 후보자들도 있다. 터무니 없는 불만을 털어 놓거나 다른 후보와 비교하지 말라는 식이다. ‘마치 국회의원이 다 된 양 행세’하는 후보자들도 있다.

이 지역의 한 기자는 “기분이 나쁜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다. 당선이 된 뒤 두고보자는 식으로 기자들을 대한다”며 “언론의 기능을 당선과의 관계 여부로만 판단하는 일부 후보자들의 언론관이 우스꽝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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