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무언가 크게 잘못된 일이다. 피가 흥건히 고이고, 서로 믿지 못하며, 떨어진 귀를 붙들고 거기 여보세요라고 말을 건 다음 킬킬대고 웃는다. 쿠엔틴 타란티노감독의 데뷰작 <저수지의 개들>은 웃자고(?) 만든 영화이다. 그러나 그걸 보고 함께 웃는 것은 함정에 걸려드는 것이다.

이야기는 단순명쾌하다. 다섯명의 갱이 있다. 그들은 서로 이름도 모른다. 서로 정해진 색깔에 따라 미스터 화이트(하비 카이텔), 미스터 오렌지(팀 로스), 미스터 핑크(스티브 부세미), 미스터 블론드(마이클 매드슨), 미스터 브라운(쿠엔틴 타란티노)라고 부른다. 그들은 보석상을 털 예정이다. 성공할 것인가?

놀라지 마실것. 이 영화에 보석상을 터는 그런 장면은 없다. 마돈나에 관한 음담패설이 끝나고 나면 장면은 단도직입적으로 에필로그에 들어간다. 이미 보석상을 털었고 그들은 창고로 모인다. 문제는 이 중 누군가 가 경찰의 끄나풀이라는 것이다. 이미 브라운은 죽었고, 오렌지는 배에서 쉴새 없이 피를 쏟고 있다. 이제부터 색출작업이 시작된다. 도대체 누구인가?

타란티노는 지나치게 영화를 많이 보았다. 그래서 그는 내기에 아주 능하다. 조금이라도 지루하거나 상투적이라고 생각하면 미련없이 버린다. 문제는 그가 거는 내기의 대상은 바로 앞에 총을 들이대고 쏠까 말까, 찌를까 말까, 죽일까 말까라는 질문앞에 놓인 꼼짝못하는 상대이다.

타란티노는 항상 그 선택의 순간에 자기가 본 영화의 반대패를 든다. 그리고는 매번 이길때 마다 좋아서 어쩔줄을 모른다. 타란티노는 이야기를 끌고가는 과정이 너무 지루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두 버리고 내기만을 남겨 놓는다. 이야기는 엉망진창이 되고, 등장인물들은 매번 엉뚱한 순간에 끌려 나온다. 이제 여기 영화사상 본적이 없는 내기의 미장 센이 등장한다.

다시 한번 밟아나가 보자. 타란티노는 이야기 대신 장르의 규칙을 따른다. 이미 알고 있는 규칙을 타란티노는 복습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의 이야기를 마음대로 생략한다. 타란티노가 시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퍼즐처럼 만들고 전혀 다른 질서에 따라 모자이크하는 것은 이야기와 장르의 규칙을 서로 이율배반의 모순에 빠지게 하는 내기의 순간이다. 인물들은 점점 더 장르를 따르고 이야기는 점점 더 규칙을 벗어난다. 그래서 메타내러티브와 하이퍼 텍스트는 거의 서로 맞서며 파산지경에 빠진다. 문제는 어느 쪽이 먼저 지느냐이다.

이것은 타란티노가 심야 라디오 신청곡 프로그램에서 가져온 ‘낯간지러운’ 미학이다. 프로그램이 시작되고 여기 초대손님이 다섯명 나와서 자기 고백담을 들려주고 신청엽서도 읽어주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짜맞춘다. 슬슬 농담이 시작되고 농담이 진담이 된다. 계속 떠들면서 자기를 증명해야 한다. 끝말잇기가 이어지고 대답 못하면 죽는다. 이건 말 그대로 잡담의 세계이다. 그러나 타란티노의 주인공들은 잡담에 목숨을 건다.

이것이 새로운 미학이라고? 그렇다. 내기만 남은 필름 느와르, 장르와 싸우는 이야기, 초대손님처럼 모인 주인공들, 그리고 자기가 뽑은 신청엽서에 운명을 맡겨야 한다. 하지만 어떠랴. 주인공이라고 해봐야 모두 악당인 것을. 그런 의미에서 타란티노는 역설적인 도덕주의자(?)이다. 악당들과 배신자는 모두 죽는다. 그런데 그들은 마지막 순간에 깨닫는다. 장르가 자신의 운명이었음을.

타란티노의 세상은 영화의 리얼리즘이며 비디오 가게 점원의 새드 매조히즘이며 영화가 영화(들)를 베끼는 영화의 두번째 백년의 위험한 내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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