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의와 검열이 여전히 문화예술을 멍들게 하고 있다. 최근 출판분야에서는 <에로스 훔쳐보기>, 영화에서는 <유리>가 심의와 관련해 유통과정에서의 유·무형의 압박을 받는 등 문화예술에 대한 전근대적 통제가 아직껏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다. 또 심의과정에서의 심의위원들의 무원칙과 무소신이 겹쳐져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도서출판 심지(대표 이승배)에서 발행한 <에로스 훔쳐보기>. ‘예술과 성에 대한 에세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미술의 대중화와 성에 대한 인식의 제고’라는 기획의도에서 발간됐다. 피카소·쿠르베 등 미술사의 거목들과 한국화의 거장인 단원 김홍도 등이 성을 주제로 그렸던 그림 98점과 그 그림들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 책이 간행되자 간행물윤리위원회가 발끈하고 나섰다. 출판물에 대한 사후심의를 하는 간륜은 3개 분과로 꾸려져 있다. 분과회의의 1차심의를 거치면 전체회의에서 그 결정을 최종 공식화하게 된다. 1차 심의를 맡은 간륜 제2분과위원회는 책에 수록된 몇몇 그림을 문제삼고 이 책을 ‘음란도서’로 규정했다. 이유는 “구체적인 남녀 성기와 성희 장면들이 노골적으로 묘사 표현되어 청소년에게 성적 행위를 연상시켜 수치스러운 느낌을 준다”는 것이었다.

취해진 조치는 간행물윤리위원회가 해당 출판사와 책에 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조치인 ‘제재’였다. 제재는 출판사 등록취소와 판매금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결정은 번복됐다. 이례적으로 전체회의에서 분과회의의 결정을 뒤짚어 놓은 것이다. 행정적 조치가 없는 ‘경고’로 그 수위가 낮춰졌다.

그런데 문제는 이 결정이 심의위원회나 심의위원들의 전문성과 소신에서 나온게 아니라는 점이다. ‘음란도서’규정과 관련 이 책과 관련한 기사를 몇차례 내보낸 언론의 여론화에 맞설 간륜의 대응책이 없었던 탓이다. 간륜은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나름대로의 자구책을 이끌어낼만한 ‘조직적 탄력’이 모자랐던 것이다. 간륜이 내세우는 문화예술에 대한 잣대가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간륜의 기능 자체가 유명무실해진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간륜의 위상인 셈이다.

다음, 하명중영화제작소에서 제작한 영화 <유리>. 신예 양윤호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인 이 작품은 난해하기로 소문난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를 각색, 생명의 본질에 대한 탐구와 구도과정의 힘겨움을 형상화한 것으로 소설못지않은 영화적 실험성을 내세워 영화계 안팎의 관심과 기대를 모았던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공연윤리위원회에 심의제출되자 파문이 일고 있다.

공륜은 이 작품을 심의한 결과 살인·정사장면, 파격적인 수행방법 등이 특정종교, 곧 불교와 관련해 문제의 소지가 있다며 심의를 보류했다. 내부적인 판단유보인 셈이다. “한국영화에 관한한 관용의 폭을 넓히고 있다”는 평을 뒷받침하듯 공륜은 곧 자문위원을 구성해 재차 심의에 나섰다.

그런데 이 자문위원 구성이 공륜의 본질적 책임을 회피하는 일종의 ‘떠넘기기’에 급급했다는 비난을 받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자문위원들은 조계사 스님 등 불교계 인사 6명으로만 꾸려졌기 때문이다. 감독과 자문위원들과의 심의에서는 조계사쪽의 “이대로는 안된다”는 강력한 반발이 나왔다. 수정·보완요구도 불거졌다. 충분히 예견됐던 결과였다.

공륜은 “불교계와 타협만 된다면 곧바로 심의를 내주겠다”는 식의 답변을 제작사쪽으로 흘렸다. 감독과 제작사는 “종교를 다뤘을때 관련종교단체들에 심의를 맡긴다면 선전·포교용 영화밖에 더 나오겠느냐”며 공륜의 직무유기를 비난하며 불교계와의 타협에 불응, 공륜의 소신있는 심의를 계속 요구하고 있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자 <유리>는 국내개봉은 고사하고 해외영화제 출품 계획마저도 심의가 나오지 않아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한편에서는 총선정국과 맞물려 현정권의 ‘불심 되돌리기’와 관련해 공륜의 지나치게 정치적인 처신을 하는게 아니냐는 분석도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공륜’이라는 이름의 심의가 제기능을 넘어 왜곡되게 문화예술에 작용하고 있다는 반증인 셈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