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은 에즈라 보겔 페어뱅크센터 소장, 카터 에버트 한국연구소장 등 토론자 이외에도 강정인 서강대교수 등 일반 참석자 등이 참여한 가운데 발제자인 김재홍차장과의 일문일답 형식으로 개최됐다. 주요토론 내용을 요약소개한다. 중복되는 질문들은 묶어 종합, 정리했다.


-하나회 장교들 대부분이 미국인에 의해 훈련받았는가.

“하나회는 4년제 육군사관학교 출신 중 일부 장교들에 의해 조직된 비밀사조직이다. 한국의 정규육사는 미국 군사고문단의 지도아래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식 교범과 훈련방식을 채택했다. 또 하나회 장교들은 대위나 소령시절 대부분 미국의 특수전학교나 참모대학 등에 유학했다. 당시 한국군 장교들 사이에는 미국군사학교에 유학하는 것 자체가 큰 혜택이었으며 그것부터 하나회가 독점해나갔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전두환 노태우씨도 모두 대위시절 미국 특수전학교에 파견돼 6개월 이상 훈련받았다.”

-군사주의 방식이 한국적 현실에서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냉전시대에 북한과 소련 중국의 군사적 위협을 고려할때….

“냉전과 외부로부터의 위협은 이승만정권시절에도 있었다. 따라서 이대통령도 군사주의를 키웠으며 정치군인을 이용했다. 원용덕 당시 헌병사령관이 대표적인 이정권하의 정치군인이다. 그러나 군인이 쿠데타를 통해 최고통치자가 되는 것과 문민정부 아래서 정치군인으로 이용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국가안보를 내세워 쿠데타와 군정체제를 정당화 할 수 없는 일이다.”

-박대통령 살해사건이 안일어났다면 광주학살도 없었을 것 아닌가.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우려했듯이 79년 10월 18일 전후의 상황으로 미루어 박대통령이 피살되지 않았다면 부산 마산에서 먼저 그런 불상사가 터졌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김재규의 진술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다고 해도 79년 10월의 부산 마산과 80년 5월의 광주는 상황이 흡사 복사한 것 같다. 다만 부산과 마산의 경우 박대통령 피살이라는 엄청난 충격과 과도정부의 민주화 약속 등으로 일시 가라앉았기 때문에 유혈진압을 비켜갈 수 있었다고 분석된다.”

-발표자의 입장이 너무 편향돼 있는 것 아닌가. 다른 증언자들은 박정희체제의 공로에 대해 긍정적인 자료들을 내놓고 있다. 박씨가 살해당하기 직전 유신헌법을 고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김정렴 전대통령비서실장이나 유양수씨 등 주요인사들의 이야기다.

“역사기록이나 사회과학적인 연구에 있어서 그 생명은 객관적이고 진실한 증언과 자료들을 어떻게 선별하느냐의 여부로 좌우된다. 박대통령의 전기를 청탁받아 집필한다면 그 가족 친척과 추종자들에 의한 미담 및 합리화 자료도 동원될 수 있다. 이들 인사들이야말로 박정권에 대한 평가에서 편향적일 수 밖에 없다. 이들보다 저널리스트가 더 편향적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이른바 통치사료나 측자들의 일기 같은 것은 정밀하게 여과돼야 한다. 조선사연구에서 이조실록을 읽을 때도 그 정도의 방법론은 필수적이다. 특히 미국의 한국학연구자들이 한국을 방문해서 증언을 청취할 때도 영어를 할줄 아는 사람들만 주로 만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도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국인의 다수이며 한국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한국인의 의식을 더 잘 대변할 것이다.”

-군정체제에 참여한 한국의 대학교수나 언론인들은 스스로 그런 길을 선택했던 것 아닌가. 참여를 강요당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체제의 독재정치와 인권탄압 언론통제 등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하지 않는가.

“집단적 개념의 한국지식인들에게 큰 책임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개별적으로 보면 군정참여자들이 지식인 공유의 도덕성보다는 군인정치인들과의 동향의식이나 출세주의와 같은 전근대적인 사고에 더 지배됐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지식인들의 저항이 약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특히 언론은 그동안 군정에 저항적이었는가, 협조적이었는가. 내가 듣기로는 언론인들의 입장이 분열적이었다는데….

“한국의 저널리스트로서 한국언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움을 느낀다. 다만 비유적으로 설명한다면 하버드대도 63년부터 한국언론인 중 매년 1명씩을 니만펠로로 선발하다가 75년부터 89년까지 무려 15년간 한국언론을 제외시켰다. 박정희체제가 민주정치를 완전히 변질시킨 유신체제 이후 노태우체제 초기까지의 기간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그것은 한국의 언론인들에 대한 경고보다는 정치체제를 문제시했기 때문이다. 물론 언론인들 자신이 언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전두환 그룹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최후단계가 언론인 강제해직과 언론사통폐합이었다. 언론인들의 투쟁도 있었으나 군사독재와 맞싸우기엔 한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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