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이다. 비극이다. MBC에 들어온 게 잘못이고 이 시대에 살고 있는 게 불행이다. 우리가 도대체 MBC의 현 상황에 대해서 얼마 만큼의 책임질 부분이 있는 것일까? 왜 하필 우리가 이래야만 하나? 보이지 않는 적, 만져지지 않는 결과와 싸우는 우리의 싸움은 얼마나 피곤한가! 우리는 민주투사도 아니고 정치꾼도 아니고 그저 한 사람의 방송인이기 위해서 MBC에 들어왔는데… 그러나, 한숨 한번 내쉬고 가자. 우리는 가야 한다.

이미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걸 알아 버렸음으로 우리가 버린 선배들도 바로 한때는 우리와 같은 목소리를 내다가 멈추었기 때문에 버림받게 되었음을 알아버렸음으로 이른 아침, 늦은 시간, 잠자는 얼굴만을 볼 수 있는 우리의 아이들이 깨어났을 때, 자식의 초롱한 눈망울을 똑바로 볼 수 있고 싶으므로.”
1988년 12월 1일 MBC 노조는 정부의 MBC 장악 의도를 저지하기 위해 파업 찬반 투표를 실시했다. 이 파업 투표를 실시하며 는 그 괴로운 심정을 위와 같이 토로하고 있다. 그야말로 눈물겨운 한탄이다.

나는 지난 90년 <한국방송민주화운동사>라는 책을 낸 적이 있다. 책 선전을 하려는 게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라. 그 책은 내가 썼다기 보다는 5공 말기부터 전개된 방송사 노조의 피땀어린 방송민주화 투쟁 기록을 정리한 것이었다. 나는 그 책을 다시 읽다가 위에 인용한 절규에 접하면서 그리고 그 이후로도 계속된 MBC 사원들의 힘겨운 투쟁에 접하면서 까닭모를 전율과 분노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까닭이 없는 게 아니다. 다만 믿기지 않을 뿐이다. 지난 8년간 우리는 제자리 걸음을 해왔다. 1996년 현재 MBC 사원들은 지난 88년에 겪어야 했던 고통과 번민을 또 앓고 있다. 그들이 무슨 큰 죄를 졌다고 88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의 매년 그런 진통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우리를 더욱 전율케 하는 사실은 지금 MBC 사원들이 싸워야 할 ‘보이지 않는 적’은 88년 당시 그들의 투쟁에 뜨거운 박수와 감사를 보냈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 박수와 감사를 보냈던 사람들은 방송의 불공정 보도에 한이 맺혔었다! 정말이다. 생생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지금은 ‘보이지 않는 적’이 되어 MBC 사원들에게 배은망덕을 범하고 있다.

선악의 구분은 무의미한가? 정의와 불의의 구분은 불가능한가? 민주와 반민주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구분은 단지 권력을 쥐었느냐 쥐지않았느냐 하는 차이 뿐일까?

‘보이지 않는 적’에게 고하노니, 과거로 돌아가라! 당신들은 한때 MBC 사원들을 모두 업고 다녀도 시원치 않을 만큼 MBC 사원의 방송민주화운동에 감격했었다. 지금 당신들이 저지르는 배은망덕의 의미는 매우 심각하다. 당신들은 선악의 구분, 정의와 불의의 구분, 그리고 민주와 반민주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 있다. 정말이지 그래선 안된다. 그건 이 나라 국민의 정신 파탄을 초래할 수도 있다.

MBC 사원들의 요구가 부당하다고? 5공과 6공 사람들도 그런 말을 했었다. 그러나 당신들은 그 당시 MBC 사원들의 요구가 정당하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대답하라. 내 말이 틀리는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다. 달라진 건 당신들의 처지일 뿐이다.

우리 자신이 너무 처량하지 않은가? 우리 국민이 겨우 이 정도 밖에 안된다는 게 수치스럽지 않은가? MBC 사원들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그들이 방송사를 팔아서 개인적인 치부를 하겠다고 그랬나? 반정부운동을 하겠다고 그랬나? 그들의 요구는 너무도 순박한 것이다. 자식의 초롱한 눈망울을 똑바로 볼 수 있을 만큼 방송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켜달라는 것 뿐이다.

개혁은 파랑새가 아니다.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개혁을 위해 방송을 마음대로 주물러야 한다는 생각일랑 행여 하지 마시라. 전두환씨와 노태우씨로부터 무엇을 배우는가? 그들인들 나라를 망칠 생각을 했었겠는가? 민주주의란 잘해보겠다는 뜻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다. 그 뜻을 행동에 옮기는 과정과 방법이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과정과 방법의 철학인 것이다. 민주주의를 유린하면서 이룰 수 있는 개혁은 없다.

이건 호소요 탄원이다. 한때 MBC 사원들의 방송민주화 운동에 같이 박수를 보내고 감격했던 민주 시민으로서의 호소요 탄원이다. 제발 더이상 우리 모두를 비참하게 만들지 마시라. 88년은 88년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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