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이’가 노점상의 전유물은 아닌 모양이다. 시간에 쫓겨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도매금으로 팔아치우는 노점상마냥 시사만화도 정치판 떨이에 나섰다.

시사만화가 떨이판에 올린 건 4·11총선에 나선 선량후보들. 시사만화는 이들을 불법·탈법 선거운동의 책임자로 싸잡아 비난하고, 4·11 총선을 쓰레기판에 비유하고 있다. 국민일보(국민만평, 3월16일)는 이번 총선을 흑색선전과 탈법, 유언비어가 횡행하는 쓰레기판에 비유했고, 세계일보(‘허심탄’, 3월21일)는 선량 후보들을 어린애만도 못한 ‘추한 어른들’로 비난했다. 한겨레신문과 한국일보도 마찬가지. 한겨레신문(‘미주알’, 3월16일)은 선량 후보들을 불법·타락·사전 선거운동을 일삼는 사람들로 묘사했고, 한국일보(한국만평, 3월19일)는 주인(선관위)마저 안중에 없는, 간 부은 수탉에 비유했다.

암울하다. 이들 시사만화의 시각 대로라면 차라리 안 보고, 안 듣고, 안 찍는 게 현명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느 누구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불법·타락 선거를 주도하는 자격 미달의 후보들로 밖에는 안 보이니까. 쓰레기판에서 어찌 희망을 찾을 수 있겠는가.

이들 시사만화에 진실성이 없는 건 아니다. 사전 선거운동이 공공연히 저질러지고 있으며, 상호비방은 이미 위험 수위를 넘은 게 사실이다. 일부 시사만화의 지적처럼 선관위가 무력화될 정도로 불법·탈법 선거운동이 만연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불법과 탈법이 저질러지는 선거판 한쪽에서 준법을 실천하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이 간과돼서는 안된다. 부분은 부분으로서 취급돼야 한다. 그러기에 비판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익명의 대상이 아니라 실명의 대상을 향해, 추상어가 아니라 구체어로 말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들 시사만화는 부분의 경계선을 나누지 않았다. 옥석을 가리는 수고를 다하지 않은 채 이들 시사만화는 도매금으로 선량 후보들을 진흙탕의 싸움꾼들로 매도해 버렸다.

모든 걸 말하는 것 같지만 정작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이들 시사만화를 보면서 부동표가 전체 유권자의 40%를 넘어선다는 각종 여론조사가 떠오른다. 전체 유권자의 절반 가까운 이들을 정치적 미아로 만든 이 현실에 대한 책임을 단지 정치권에만 물을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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