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년 5월 파리에서의 학생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한 이탈리아 공산당 당원이자 시인이었던 남자가 실의에 잠겼다. 그래서 그는 늘 읽던 마르크스를 덮고, 그람시가 그의 계급의식을 깨달았던 튜린으로 여행하면서, 프로이드를 읽었고, 그리고 보르헤스의 소설을 영화화하기로 했다.

이 얼마나 모순된 이야기인가? 베르날도 베르톨루치의 <거미의 계략 >은 그 모순을 풍요로우리만치 고스란히 담고 있는 영화이다.

이 영화의 원작은 호르헤 보르헤스의 단편 <영웅과 배신자에 관한 논고 >이지만 좀더 정확하게는 독후감처럼 마음대로 재해석되고 덧붙여져서 거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고쳐졌다. 영화의 무대는 이탈리아 지방에 자리한 (가상도시인) 타라. 이 마을에 아토스 마냐니 2세가 찾아온다.

그의 아버지 아토스 마냐니는 이 마을의 영웅이다. 그는 반파시즘 투쟁에 앞장 섰으며, 마을에 찾아올뻔 했던 무솔리니의 암살계획을 세웠으며, 극장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니골레토 >의 상연 도중 암살당했다. 마을에는 아버지를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졌고, 매년 기념행사가 열린다. 아들 아토스는 마을에 와서 아버지의 정부와 세친구를 만난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를 칭송한다. 그러나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버지가 사실은 더러운 밀고자였으며, 친구들에게 처형당한 것임을 알게된다.

바로 이것이 이 영화의 수수께끼이다. 처형당한 자가 왜 영웅이 되었는가? 이들은 아버지 아토스가 인민의 영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가 배신자라는 사실을 인민들이 알게되면 얼마나 절망하고, 얼마나 깊은 혼란에 빠질 것인가를 두려워 한다.

마침내 거래가 이루어진다. 극적인 순간에 죽음을 맞이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그를 신화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인민들의 마음 속에서 신화를 끊임없이 재생산 하는 것이다. 파시즘으로부터 해방하는 그날까지. 그러나 진실은? 정말로 투쟁은 무엇을 위한 투쟁인가?

베르톨루치는 기꺼이 그 미로에 빠져든다. 그래서 파시즘과의 투쟁은 이제 더 이상 부르주아연합과의 싸움이 아니며, 권력과의 전쟁이 아니다. 그건 외디푸스의 자기비밀과 맞서는 자기 컴플렉스에로의 추락에 다름아니다. 세상은 출구가 가로 막힌 미로로 바뀌고, 역사는 추리소설과 같은 것이 되어 버리고, 계급투쟁이란 더 이상 없다.

사적 소유와 사회적 생산 사이의 모순은 순식간에 증발해버리고, 누가 누구를 속이고 누가 누구를 착취하는지 알 수 없는 내기가 된다. 그래서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은 이데올로기의 허깨비를 걷어내기는 커녕 마치 베르디의 비극적 오페라의 장중한 아리아와 함께 극장의 무대와도 같은 것이 된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처음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이 영화의 무대의 이름인 타라는 (마가렛 미첼의 소설이 아니라) 할리우드의 성공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빌려온 것이라고 베르톨루치는 수줍게 고백한다.

베르톨루치는 세상과의 싸움에서 그람시의 두개의 패 중에서 ‘의지의 낙관주의’ 대신 ‘패배의 지성주의’를 선택한다. 이것은 60년대 서방세계의 변혁운동에 대한 지적 파산선고를 기록하는 음울한 고백이다.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간 파시즘의 계략 속에서의 투쟁이란 나비처럼 아름답긴 하지만 더욱 더 사태를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들 아토스 마냐니는 아버지의 기일 기념행사에서 진실을 알고도 인민들 앞에서 어쩔수 없이 거짓말을 한다. 그도 역시 아버지의 계략에 말려든 것이다. 그리고는 도망치듯이 마을 기차역으로 달려가지만 기차는 계속 연착된다. 마치 영원히 오지 않을 것처럼. 파시즘과의 싸움은 뫼비우스의 띠에 말려드는 것이다. 그래서 영웅은 배신자가 되고, 배신자는 영웅이 되고, 그 비밀을 아는 자는 협잡을 하고 인민들은 아편처럼 중독된다.

바로 이 악순환 속에서 역사는 역사를 복제한다는 보르헤스의 문학적 사유는 베르톨루치에게서 패배는 패배를 복제한다는 정치적 패배로 뒤바뀐다. 이것은 우리를 절망시키는 배신이지만, 그러나 그 패배의 유혹은 너무나 매혹적이다. 언제나 계략이 그러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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