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철한 대응이 필요하다.

4일 비무장지대 불인정선언이 발표된 이후 남북간에는 근래 보기 드물었던 긴장감이 조성되고 있다. 과거 일회성으로 끝났던 침투사건이나 테러사건과는 달리 이런 조치는 정전협정체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 수 있는 심각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40년간 불완전하게나마 한반도 평화상태를 유지하는 데 안전판구실을 해 온 정전협정체제가 기능을 정지한다면 그것은 이론적으로는 정전이 아닌 전쟁상황의 재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70년대 중반부터 미국과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해왔던 조선은 지난 94년 4월 ‘새로운 평화보장체계수립’을 미국측에 공식제안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정전협정 무력화단계를 밟기 시작했다.

새로운 평화보장체계 수립 제안과 동시에 정전위원회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했고 한달쯤 뒤에는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를 개설했다. 이후 판문점에서 이뤄지는 유엔사와 조선측의 대면은 우리쪽에서는 정전위 회의 성격을 띤 것으로, 조선쪽에서는 인민군 대표와 미군대표가 만난 것으로 각각 달리 해석되는 기형적인 대면이 돼 왔다.

조선은 또 조선측에 속한 중립국감독위 대표단인 체코와 폴란드대표단도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95년 12월에는 정전위 중국측 대표단을 철수시킴으로써 이때부터 정전위와 중감위는 유엔사 한 쪽 만 남은 반쪽짜리가 되고 말았다. 지난해 6월에는 조선과 유엔사측과 영관급접촉(조선은 물론 이것도 조, 미 군사접촉으로 해석한다)에서 “정전협정을 파기할 수 있다”고 통보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번 조치는 조선측이 자신들 나름대로 마련한 ‘예정된 계획’에 따라 취해진 것이며 돌발적인 상황은 아니다. 특히 일부에서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것처럼 총선에 맞춰 일부언론이 의도적으로 부풀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조선이 취한 일련의 조치들은 미국측이 정전협정의 존속을 주장하면서 자신들이 제안한 평화협상체결, 최근의 정전협정 체결 등을 일축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나름대로의 방도를 마련했지만 매번 거부당하자 이번에는 군사적 긴장을 동반하는 강도 높은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이 굳이 미국만 상대하려는 점에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6·25전쟁(한국전쟁)에 대한 조선측 시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선측이 이 시각을 바꾸지 않는 한 미국과 평화협정 체결 주장도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즉 조선은 6·25를 ‘조국 해방전쟁’으로 규정, ‘미제의 식민지로부터 남조선을 해방시키려한 성스러운 전쟁’이라면서 미국이 자신의 전쟁 상대자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전쟁 중지 상태를 전쟁 종결 상태로 바꾸기 위해 평화협정체결은 반드시 미국이 일방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이 간여할 경우 조선으로서는 ‘민족해방전쟁’논리가 허물어지게 된다.
조선측이 억지논리를 내세우던 생떼를 쓰던 어쨌든 한반도에는 지금 유례없는 긴장상태가 조성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2백만 명에 가까운 중무장 병력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발적 무력충돌과 뜻하지 아니한 방향으로의 사태 전개 가능성을 우려하는 것은 당연하다.

허공에 대고 주먹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비난 발언과 피냄새 풍기는 ‘단호한 응징, 철저한 보복’경고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언론 3단체는 지난해 마련한 <남북사이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한 보도제작 준칙>에 군사적 긴장이 조성될 경우 평화적 해결을 추구하도록 명시했다. 이것이 민족언론, 통일언론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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