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8시까지만 확인되면 어떤 기사도 뺄 수 있다.”

한 재벌그룹 언론담당 관계자의 말이다. ‘불리한’ 기사가 나올 경우 2-3시간 정도의 시간만 있으면 기사를 빼거나 축소하는게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언론하면 벌벌떨던 과거 기업의 모습은 아니다.

이 관계자는 감히 언론사의 기사를 빼고 넣는 것을 ‘별 것 아닌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 왔다”는 경험과 “앞으로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이 관계자처럼 ‘오만’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기업 홍보관계자들도 비슷한 정서를 갖고 있다. 홍보업무만 7년째 해 오고 있는 L그룹의 한 관계자는 “작은 기사는 대리나 과장급만 붙어도 쉽게 해결된다.

‘크게 걸렸들었다’고 생각했던 기사도 어떻게 손을 썼는지 다음날 빠져버리는 것을 여러번 목격했다”고 말했다. 대리나 과장급이 나서도 웬만한 기사는 처리가 가능한 상황으로 언론과 재벌과의 관계는 역전돼 가고 있다.

기사빼기 사례 무궁무진

이들이 제시하는 사례는 무궁무진하다. 공정거래위원회 뇌물사건에 관련된 한솔그룹의 경우 기사제목에 ‘한솔’이라는 이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씨프린스호 기름유출사건과 관련해 공무원에게 뇌물을 준 호유해운은 LG그룹 계열사였다.

그러나 기사에서 그 관계를 찾아보기란 숨은그림 찾기만큼이나 어렵다. 북한과의 경협을 추진해왔던 H그룹은 지난해 1면 머릿기사로 편집이 끝나있던 북한관련 기사를 막판에 들어냈다. 기업 언론팀 사이에서 ‘무용담’처럼 회자되는 얘기들이다.

기사를 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안되는 기사를 집어넣기도 한다. 기업총수들이 머리를 식히러 놀러갔다온 것을 ‘경영신구상’등 그럴듯한 제목을 붙여 보도자료를 내보내면 대부분 기사화된다는게 홍보관계자의 말이다. 비자금 사건과 관련 재벌총수들이 줄줄이 조사를 받고 나올때 상당수 언론들은 “경제에 주름살이 간다”며 이들 총수들의 사법처리는 신중해야 한다는 식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이 모든 사례의 뒷면에는 홍보라는 이름의 검은 로비가 숨어있다.

지난해 비자금 사건이 어느정도 마무리된후 올해초 있었던 대부분 재벌그룹 인사에서는 언론담당 관계자들이 파격적으로 승진했다. 이들의 ‘활약’이 높이 평가됐기 때문이다. 그 ‘활약’이 언론과 재벌과의 ‘변화된 관계’에 기초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땅에 떨어진 ‘기자값’

경제부 기자들은 요즘 재벌과 언론의 관계를 과거에 비해 ‘천양지차’라고 표현한다. 삼성그룹을 2년 가까이 담당한 한 방송사기자는 ‘기자값’이 많이 떨어졌다고 전했다.

과거에는 계열사 사장정도는 손쉽게 만났고 취재 파트너도 이사급 이상이었는데 요즘은 부장이나 차장 수준으로 격하됐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 그룹 부회장으로 있는 이모씨가 당시 언론 홍보책임자였는데 취재를 위해 몇차례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했지만 결국 못만났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홍보책임자조차 만나는게 쉽지 않았다는 이 경제부 기자의 말은 달라져 가는 언론과 재벌과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조선일보 경제과학부 김광현기자는 최근 노보에 기고한 글에서 “80년대엔 기업체 홍보실의 임원일지라도 평기자를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요즘은 홍보이사나 홍보부장급이 신문사 경제부장이나 사회부장과 ‘맞먹으려’ 하고 있다.

홍보책임 부사장이나 전무급만 되도 평기자들은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실정이다”고 쓰고 있다. ㅈ일보의 한 기자는 “기사에 문제가 있을 경우 담당기자에게 항의하지 않고 회사 고위층에게 연락해 위에서 ‘내리찍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재벌기업이 언론을 관리하는데는 광고가 큰 무기다. 건수가 터지면 “광고 끊겠다”가 금방 나온다. 한 조간신문 경제부 기자는 삼성전자에 대한 비판성 기사를 쓰려고 취재하는 과정에서 한 이사로부터 “당신이 기사를 쓴다고 문제가 해결되는게 아니다. 당신네 회사에 주는 광고가 얼마인지 아느냐”는 말을 듣기도 했다.

얼마전 한 유력지의 경제부 데스크는 사장실에 불려 올라가 혼줄이 났다. 사정은 이렇다.

경쟁지 1면에 ㄴ그룹의 광고가 나갔는데 자사지면에는 실리지 않은 것을 본 이 언론사의 사장이 직접 ㄴ그룹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언론사 사장이 자기 신문에 광고를 주지 않은 것에 항의하며 “뭐 섭섭한게 있냐”고 묻자 ㄴ그룹회장이 “화끈하게 밀어주는게 없다”고 그간의 불만을 애기한게 화근이 된 것이다.

이 언론사 사장은 전화를 끊자마자 경제부 데스크를 불러 “잘해주라”고 질책했다. 광고가 언론보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95년 신문 총광고비는 2조4천8백99억여원, TV는 1조2천9백7억여원이다. 이들 대부분은 30대 재벌그룹에서 나오는 것이다. 삼성, 현대, 대우, LG 등 4대그룹의 경우 중앙일간지 한곳에 주는 연간 광고물량만 2-3백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루에 1억원 꼴을 주는 것이다. 그걸 며칠만 끊으면 경영진은 속이 탈 수 밖에 없다. ‘약발’은 그렇게 먹혀들어간다. 여기에 협찬, 취재경비 지원이 곁들여진다. 방송의 경우 프로그램 제작 단계에서 이미 기업의 협찬을 전제로 한다. 협찬을 얼마받을 것인지를 미리 상정하고 제작계획을 짜는게 관행이다. 재벌그룹이 설립한 언론재단을 통한 연수도 한 몫을 거든다. 그렇게 쏟아부운 돈이 결정적인 순간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분명 재벌은 거만해지고 있다. 언론의 공격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쳐있다. 나아가서 언론을 관리하려 하고 있다. “재벌에 대한 비판기사는 의레 못나오는 줄로 알고 있다.

오히려 자기기업 PR성 홍보기사들로 가득 채워지기를 강요하고 있다”는 한 기자의 고백은 숨길 수 없는 우리 언론의 현주소다. 그 이면에는 국가를 경영하겠다는 재벌의 야심이 숨어있다.


“비판기사 쓰지말라”

최근 삼성은 <삼성경제연구소>를 장기적으로 독립된 공공연구소로 변신시키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그룹에서 떼내 미국 헤리티지재단처럼 국가 사회의 기본 이데올로기부터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영향력있는 독립기관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대단히 의미심장한 내용이다. 한국을 경영하겠다는 선언으로 읽혀지기 때문이다. 재벌이 지배주주가 된 ‘한국주식회사’에서 언론은 그들의 전략수행과 홍보를 위한 ‘매우 중요한’ 하나의 부서정도로 취급될게 뻔하다.

문제는 언론이 여기에 백기를 드는 모습을 보이는데 있다. 지난해 한 신문사는 적자를 이유로 기자들에게 광고유치 차원에서 “기업 비리나 비판적인 기사는 쓰지말라”고 했다. 간부회의에서 그렇게 하기로 했고 기자들에게 이를 ‘지침’처럼 전달했다. 비자금 수사때 일부 재벌계열 언론사는 기자들을 직접 로비에 동원하기도 했다.

이런 현실이 재벌총수 이름을 쓰는 기자의 손길을 머뭇거리게 하고 있다. 시끄러울게 뻔한 기업 비판 기사는 아예 쓰지 않는다. 취재할 생각조차 안한다는게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 이상기류속에서 언론은 재벌과의 협조, 밀착이라는 단계를 넘어 ‘재벌우위’의 어두운 터널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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