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이 침체에 빠져 있을 때 상하구분 없이 안타를 쳐주는 것이 현대가 최근 좋은 성적을 거두는 원동력이지요.”

11일 토요일 2시 광주구장에서 열리는 현대 유니콘스와 해태 타이거스의 중계를 맡은 KBS 스포츠 캐스터 정도영 부장(54). 하일성 해설위원이 그의 단짝이다.

4회 이후 소강상태에 빠져 들었던 게임이 7회 들어 현대 하위타자들의 연속안타로 활기를 띠기 시작하자 정도영 캐스터가 하일성 해설위원에게 말을 건넨다. 4회까지 4대1로 해태가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등판한 해태 이대진 투수가 연거푸 삼진을 잡으며 게임이 한쪽으로 쏠려 맥이 빠졌었으나 7회 1사 이후에 나온 현대 이숭용과 하득인의 연속안타로 경기가 활기를 되찾으면서 덩달아 정 캐스터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경기 전체적 흐름 파악’ 첫걸음

광주중계는 올들어 처음이다. 해태가 잘 나가던 몇년 전 만 해도 광주는 야구중계방송의 단골지역이었다. 그런데 해태가 부진하자 광주는 지방별로 도는 쿼터제에 걸려서야 내려가게 된다.

정 캐스터의 광주중계는 중계 전날인 금요일 게임을 보기 위해 광주로 내려가는 것부터 시작한다. 기차편으로 광주에 도착해 역 밖으로 나오니 짐이 제법 무겁다. 역 앞에 있는 깨끗하게 보이는 호텔에 방을 잡고 노트북을 든 가방만을 들고 운동장으로 향한다.

경기장에 도착하니 경기까지는 얼마의 시간이 있다. 중계는 하지 않지만 앞으로 세시간 동안 전반적인 경기흐름을 미리 파악해둬야 한다. 선수들 신상이나 컨디션부터 작전의 흐름까지 풍부하게 곁들여야 좋은 중계를 할 수 있다. 급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신문이나 방송으로 전날 경기를 정리하기도 하지만 가능하면 하루전날 와서 경기를 본다.

기자실이 차 있어 선수실에 들어가서 경기를 본다.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한다. 한참을 딱딱한 의자에 앉아있자 엉덩이가 아파온다. 문득 재작년 치루에 걸려서 곤혹을 치른 기억이 떠오른다. 94년 대전 개막전에 추운 바닥에 앉아있다가 치루로 수술까지 하는 곤혹을 치른적이 있다. 한 자리에 오래 앉아있어 걸리는 항문 질환이나 중계중에 끼어야하는 헤드폰 때문에 생기는 이명증은 캐스터들이 흔히 시달리는 일종의 직업병인 셈이다.

해설자와 호흡맞추기 특히 중요

경기는 해태가 초반부터 야금야금 점수를 내줘 차이가 벌어져 재미가 없어진다. 승패는 이미 결정난 것 같다. 이렇게 일방적인 경기는 관중이나 시청자 뿐 아니라 중계자들도 맥빠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선수를 체크하고 내일 경기의 쟁점을 찾기 위해 끝까지 경기장을 나서지 않는다.

경기가 끝나자 오늘 경기의 기록표를 챙기기 위해 구단 사무실을 찾으니 하일성 해설위원이 들어온다. 그도 경기를 보고 오는 중이다. 하위원과의 인연도 벌써 20년째다. 무던하고 차분하기로 소문난 정 캐스터지만 하위원과는 애환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82년 일본에서 열린 고교야구 경기중에 한국투수를 일본투수라고 계속해서 소개한 것이다. 노찬엽선수가 나올 타석에 일본 선수가 나온 것을 보고야 투수가 한국선수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도 그 실수담이 생생한데 이제 노찬엽선수는 프로야구의 고참선수가 돼있다.

정캐스터는 중계초기부터 콤비를 이루던 하위원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상황설명이 가능하고 치밀한 것이 장점인 해설위원”이라고 말한다.

야구는 대단히 많은 경우의 수가 있고 그것을 해설자나 캐스터 둘 중에 하나는 대비해야한다. 준비가 안돼 있으면 당황하게 돼있다. 그런데 하위원과는 20년의 인연으로 완벽에 가까운 조화를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금요일 밤, 정캐스터가 호텔에 도착한 것은 12시 경이다. 술은 피곤해서 못했지만 일이 지연되다보니
12시에야 도착한 것이다. 씻고 TV를 보다가 잠이 든 것은 1시지만 중계일인 토요일에는 7시면 여지 없이 눈이 떠진다. 먼 이동과 낯선 잠자리 탓인지 몸이 피곤하다. 하지만 이제 중계준비를 위해서는 일어나야한다.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밖에 나와 하늘을 보니 해뜰 시간이지만 대지는 침침하다. 어제 일기예보에서 날씨는 좋다고 했지만 지난 주 전주 경기가 비 때문에 취소됐던 터인지라 조금은 불안하다.

숙소 주변에서 가볍게 아침식사를 한 뒤 스포츠신문 두 가지를 사 들고와 노트북컴퓨터의 자신이 만든 데이터베이스안에 입력한다.

정 캐스터의 자료관리는 정평이 나 있다. 올해도 그는 시즌이 시작되기 두 달 전부터 자료입력을 시작했고, 그 덕분에 눈이 더욱 나빠졌다. 치밀하고 풍부한 자료만이 좋은 중계방송을 가능케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1시간 30분 가량 꼼꼼하게 자료입력을 마친 뒤 30분 가량 분장을 한다. 분장 역시 TV중계방송 캐스터의 필수요소다. 분장이 끝나자 가방을 챙겨서 운동장으로 향한다.

전력약한 팀 이기면 기분좋아

운동장에 도착한 것은 11시 30분. 지정석 상단에 있는 중계실에 올라가서 노트북을 꺼내 켜고 점검을 하는데 문제가 생겼다. 날씨가 너무 화창해 노트북컴퓨터의 글씨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여러 각도로 컴퓨터를 옮겨놓아보지만 마찬가지다. 결국 오늘은 수작업을 할 수 밖에 없다.

일단 기본자료를 챙겨서 중계석을 나온다. 잠시 짬을 내 운동장안에 있는 식당에서 허겁지겁 점심을 때운다. 아직 시간이 꽤 남아있지만 할 일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구단사무실로 가서 엔트리를 확인하고, 심판실에서 라인업을 확인한다. 하위원과도 몇 마디 입을 맞춰야 한다. 경기 중 간간이 집어넣을 ‘양념거리’들은 미리 ‘입을 맞춰’두는 것이 좋다.

마침내 중계 20분 전. 억지로라도 화장실에 다녀와야 한다. 앞으로 세시간을 꼼짝없이 앉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경기 15분 전. 마침내 중계차와의 연결이 이루어졌다. 5분을 남겨놓고는 ENG카메라를 든 카메라맨이 두사람의 얼굴을 비추기 시작하기가 무섭게 이동현PD로 부터 헤드폰을 통해 큐사인이 떨어진다.

“지난해 하위팀의 활약이 두드러진 96 프로야구, 프로야구 광주경기….” 3시간에 걸친 ‘대장정’에 들어간 것이다. 이제부터 쉴 시간이라고는 간간이 이닝 사이에 KBS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순간 뿐이다.
짧은 몇 초 동안 물도 마시고 자료도 정리해야 한다.

순조롭게 진행되는가 싶더니 문제가 생겼다. 잘 들리던 헤드폰이 거의 먹통이 된 것이다. 담당PD의 말이 거의 들리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관록’으로 해결하는 수 밖에 없다. 결국 타구장 소식이나 중계카메라 움직임은 모니터를 통해 ‘감’으로 해야한다.

오늘은 초반에 해태가 3득점으로 기선을 제압한다. 광주현지 팬들의 환호에 경기장이 들썩거리지만 캐스터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 이기던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한다.

홈런이라도 터지면 목청을 높여 중계하지만 어느 편이 치던 마찬가지다. 전력질주하던 선수가 ‘아웃되면’ 함께 아쉬워하지만 이 역시 어느 편의 선수든 마찬가지다. 중계방송 중 자칫 감정적으로 흐르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좋아하는 팀을 갖지 않는 것은 대부분의 캐스터들에게 있어 한결같을 것이다.

단, 약한 팀이 이겼을 때는 기분이 좋다. 그래야만 게임이 재미있어지고 시청자들도 즐거울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처음에 긴박하던 흐름이 4회를 넘기면서 소강상태로 들어간다. 게임이 소강상태면 캐스터도 약간 맥이 빠진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흥미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해설위원과 함께 지는 팀이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전술을 내놓기도 하고, 게임이 어떻게 풀릴 것인가 하는 전망을 세워보기도 한다.

헤드폰때문에 이명증에 시달리기도

숨가쁘게 진행하다보니 어느새 8회다. 이제 게임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2사, 2·3루에서 박재홍과 이대진이 대결한다. 게임의 분수령이다. 이 승부에서 패스트볼과 박재홍의 안타로 현대는 2득점해 2점차로 좁힌다. 한 이닝이 남았지만 현대의 전력으로 볼때는 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점수다.

마지막 이닝에서 현대 김경기가 무사에 이종범의 소극적인 수비로 1루로 나가면서 박진감이 넘친다. 그러나 다음 타자 이숭용이 중견수 플라이로 잡히고, 하득인의 땅볼이 유격수 ― 2루수 ― 1루수로 이어지는 병살타로 연결돼 게임이 끝난다. 총시간은 2시간 40분. 이 정도면 시간은 딱 좋다는 생각을 해본다.

컴퓨터와 자료들을 챙기는 등 뒷마무리를 하고나니 시간은 어느덧 저녁 6시. 저녁 7시로 예약돼있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서둘러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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