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가 여성을 착취한다”

지난해 북경에서 열린 세계여성대회의 주요 의제는 미디어였다. 이 대회에서 채택한 행동강령중 여성과 미디어와 관련한 몇 부분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의 부정적이고 비하적인 여성상에 대한 지속적인 표출은 변화돼야 한다. 대부분 국가의 인쇄 및 전자 미디어는 변화하는 세계속의 여성의 다양한 삶과 사회기여에 대한 균형있는 묘사를 제공하지 않는다. 여성을 창조적인 인간, 주요활동자, 발전과정에의 공여자및 수혜자로 묘사하기 보다는 열등한 존재로 묘사하거나 성적대상및 상품으로써 그들을 착취하는 것을 삼가해야 한다.”

이 행동강령에 담겨진 인식은 미디어가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결코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미디어가 여성을 성적대상 및 상품으로서 ‘착취’하고 있다고까지 규정했다.

언론은 여성을 ‘아름다운 존재’로 그린다. 그리고 이 아름다움속에 여성의 모든 것을 묶어두고 있다. “여자는 이뻐야 한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쏟아붓고 있다. 언론, 특히 방송에서 이쁘지 않은 여자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여자가 이뻐야 한다”는건 이데올로기다. 능력있는 커리어우먼조차 동네에서는 보기 힘든 미인이다. 미인이어야 출세가 가능하다는 논리다. 때로 그렇지 않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의 여인네가 주인공이 될 때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머니와 아내라는 꼬리표가 반드시 따라붙는다. 그곳에서 인고와 순종, 희생이라는 ‘잘 포장된’ 성차별의 또 다른 얼굴이 숨겨져 있기 마련이다.

“여자는 예뻐야 한다”

언론사가 미인대회를 주최하거나 중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육체를 대중적 흥미거리로 제공한다. 거기에 등장하는 여성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잘 생겼다’는 단 하나의 이유다. 이는 돈벌이로 직결된다. 덩달아서 행사를 주최하는 언론 매체의 인지도도 높아지니 그야말로 ‘꿩먹고 알먹고’다. 상업성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세계여성대회는 이런 행위를 ‘여성의 상품화를 통한 착취’라고 표현한다. 가톨릭대 이영자교수는 ‘인격의 상품화’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여성단체들의 주장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는 1백여개의 각종 미인대회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일보가 주최하는 미스코리아대회가 가장 오래된 대회다. 춘향 선발대회처럼 민속미인을 뽑는 행사도 있고, 제주 감귤아가씨, 단양 마늘아가씨, 괴산 고추아가씨등 지방 특산물 판촉를 위해 만들어진 대회도 있다. ‘관광홍보사절 선발대회’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최근에는 방송사가 탤런트를 뽑는 과정을 미인대회화 하고 있기도 하다. ‘KBS 수퍼탤런트 선발대회’가 그것이다.

SBS ‘수퍼엘리트모델 선발대회’도 입상자의 대부분이 방송프로그램에 진출한다는 점에서 별로 다르지 않다. 여성학자이면서 방송진행자이기도 한 오숙희씨는 “이 추세로가면 말죽거리 아가씨나 무슨 아파트 몇동 아가씨가 나올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들 미인대회에는 대체로 언론사가 문화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직간접적으로 관여한다. 미스코리아대회

지역예선의 대부분은 그 지역 언론사가 주최하고 있다. 다른 미인대회도 마찬가지다. 방송의 경우는 이들 국내미인대회의 상당부분을 중계하고 있다. ‘미스 유니버시아’ ‘미스 유니버스티’ ‘세계 수퍼모델 선발대회’ 등 국제적인 미인대회도 열리기만 하면 안방으로 중계된다.

여성단체는 언론사의 미인대회가 여성을 육체만 가진 열등한 존재로 만드는 잘못된 문화풍토를 부채질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방송중계는 ‘없어져야 할’ 미인대회를 부추키고 오히려 양산하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대중을 여성의 육체를 구경하는 재미에 길들이게 하고, 암암리에 이에 대한 문화적 동의를 이끌어내는 효과를 가져옴으로써 결국 남성지배문화의 헤게모니를 강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문화적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여성들에게 신데렐라 증후군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이영자교수는 “육체로 승부를 보는 여성상을 예찬하거나 주입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뿐 아니라 여성들에게 졸지에 스타가 되는 꿈, 또는 신데렐라의 환상을 부추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후보들의 갖가지 사회봉사활동의 중계방송(미스코리아대회 출전자의 서울시장 예방, 군부대위문공연, 자선판매, 양로원 방문, 공장방문)은 미인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또 중요한 사회공헌을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미인대회’ 왜 열리나

미인대회가 기본적으로 상업성을 전제로 출발했다는 것도 여성단체의 주요한 논리중의 하나다. 대표적인 국제미인대회인 ‘미스 유니버스대회’는 여성의류및 장식류 전문업체인 ‘유니버스’라는 다국적 기업이 주최하는 이벤트 행사다. 유니버스사는 이 국제적 규모의 미인대회를 통해 거대기업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여성단체들의 이같은 비판에 대해 언론사측은 국위선양의 효과나 홍보요원으로서의 역할도 있다는 반론을 내세우고 있다. 이에 대해 여성단체들은 “여성의 몸을 이용한 국위선양이 진정한 선양이냐”며 노골적인 적의마저 드러내고 있다. 지난 9일 열린 ‘방송사 미인대회 중계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토론회에서는 “과거 경제개발시대에 요정 아가씨들이 상당한 역할을 했는데 그러면 기생관광을 주요 국책사업으로 하거나 언론사의 문화사업으로 추진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터져나오기도 했다.

미인대회가 단순히 외모만 보지는 않는다. 교양등 ‘내적인 미’도 심사대상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심사대상일 뿐이다. 96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심사기준을 보면 26개 항목중 교양미와 연관이 있는 것은 1~2개 뿐이다. 나머지는 △얼굴이 크지 않아야 한다 △ 눈과 코를 지나치게 정형하지 않았는가 △목이 짧지 않은가 △유방과 히프의 크기, 위치, 선 △몸의 상처 및 큰 점 유무등 모두 외모와 관련된 항목 일색이다.

언론계 문제의식 ‘빈약’

언론사의 문제인식도 대단히 빈약하다. 한 방송사 고위간부는 “싫으면 여자들이 대회에 나오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고까지 말했다.

여기서 언론사내의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 하다. 지난해 11일 한국여기자클럽이 여기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언론사내 성차별 실태에 따르면 남자기자들에 비해 여기자들이 ‘차별대우를 받는다’는 응답이 71.5%였다. 남녀차별이 심한 경우에 대해서는 부서배치(51.5%) 업무분담(16.7%) 승진·승급(15.7%) 순으로 답했다. 언론사내의 이같은 보수적인 흐름이 거듭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미인대회의 생명을 유지하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

언론사 주최 미인대회의 추문도 끊이지 않는다. 지난 93년 6월에는 미스경기 선발 과정에서 고모양으로부터 1천5백만원을 받고 고양을 미스경기 진에 선발되도록 하는 등 5명의 후보로부터 6천여만을 받은 경인일보 정모 사업국장이 배임수재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주최측인 한국일보 김모상무도 미용실 관계자로부터 돈을 받고 순위를 조작했다가 구속됐다. 미스코리아 진에 당선된 서모양은 “진에 당선되면 갚겠다”며 미용실관계자로부터 돈을 꿔 김상무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미인대회는 여성의 권리신장이라는 ‘변화하는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지 못하다. ‘달라져야 할’ 세상과도 거리가 멀다. 사회적 책임을 바탕으로 하는 공적 기업인 언론이 여기에 어떤 형태로든 발을 걸치고 있는 것은 그리 모양이 좋아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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