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지는 언제부터 있었을까. 부산대 신문방송학과 채백교수는 근대신문의 효시인 <독립신문>에도 독자투고를 둘러싼 촌지가 있었다는 흥미로운 연구결과(언론과 사회 3호·독립신문 독자투고의 현황과 특성에 관한 연구)를 내놓은 바 있다.

독자들이 자신의 투고내용이 지면에 소개되기를 바라면서 돈을 넣어 편지와 함께 우편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이런 사례가 있을 때마다 <독립신문>은 지면을 통해 이는 신문의 규칙을 모르고 한 잘못된 행위로써 돈을 받을 수 없으니 와서 찾아가라고 공시했다. 그 첫 사례는 1896년 11월 9일자 기사다. “해주 인민들이 신문샤에 편지하였는대 자기 관찰사 잘 한단 말을 신문에 올녀 달나고 하고 돈 십젼을 보내스니 우리는 신문에 광고난 돈을 받되 다른 돈은 아니 받는지라 해주 인민들 돈 십젼 보낸 거슨 무삼 돈이지 쇽히 신문사에 와셔 차자 갈지어다.”

이에 대해 채백교수는 당시 해주 관찰사가 벌인 언론플레이 흔적이 짙다고 분석했다. 이 기사가 실리기 얼마전인 1896년 10월24일자에 해주 인민들 명의로 관찰사의 비행과 학정을 알리는 투고가 있었다는 것이다.

채교수는 고발성 투고가 게재된지 한달도 안돼 관찰사의 선정을 알리는 투고가 돈과 함께 들어온 것은 언론플레이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이후에도 제주와 포천 백성들이 투고 관계로 돈을 넣어 보내는 등 이같은 일이 계속해서 발생하자 <독립신문>은 1년후인 1897년 11월27일자 기사에서 보다 단호한 입장을 밝힌다. “그 편지가 정직한 일 같을진대 엇지 돈을 너흐리요 필시 그 편지 하난 일이 올치 못한 까닭에 돈을 너음이라. 돈 너흔 편지는 영위 신문에 내가 아니 할터이니 그리들 알며”라고 하며 돈을 넣은 편지는 게재하지 않을 방침임을 분명히 했다.

채교수는 근대신문 초창기에 이처럼 촌지가 있었다는 사실은 언론을 사회적으로 영향력있는 ‘권력기관’으로 보는 인식이 당시에도 존재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백성들이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사법기관보다 언론에 호소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촌지에 대해 <독립신문>이 대응하는 자세는 오늘의 언론인들에게 역사적 귀감이 될 만하다. 부당한 돈을 절대 받지 않았으며 돈을 보낸 사람을 신문을 통해 공개함으로써 이를 예방하려 했다. 그래도 찾아가지 않는 돈은 내부 지방국을 통해 돌려주거나 나중에는 감옥의 죄수들을 위한 복지비용으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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