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한 것은 없다. 방식만 달라졌을 뿐이다.” 기자들의 촌지행태에 대한 한 종합일간지 기업 담당 기자의 진단이다. 취재현장에 여전히 ‘돈 봉투’가 넘쳐난다는 것이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하다는 반응도 있다.

지난해 12월 경제부 기업 담당 기자로 자리를 옮긴 모기자의 5개월간 ‘부수입 명세서’를 보자.
△현대자동차 소나타3 신차 발표회-상품권 50만원 △삼성그룹 비서실장 간담회-양복 한벌 맞춤권(금액 무한정) △삼성그룹 홍보팀장 간담회-싯가 50만원대 삼성카메라 △현대 정몽준 회장 취임식- 현금 50만원 △구정 기업 선물-주유권 50만원, 선물세트 20여개.

일단 기억에 떠 오르는 것이 이 정도 수준이다. 사소한 것은 부지기수다. 이 기자는 그래도 ‘의식’이 있는 기자로 통한다. 숱한 촌지 봉투와 상품권을 다시 보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기사를 겨냥한 기업의 봉투 공세나 선물 공세는 절대 사절이다. 한 마디로 수동적인 촌지 수용자인 셈이다.

촌지에 공세적인 기자는 어떤가. 지난해 11월 백화점 홍보담당자들이 ‘치’를 떨었던 모 방송사 기자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 기자는 백화점에서 고가의 제품을 구입하고 대금을 지불하지 않는 등 심하게 표현하면 ‘매장’을 휩쓸고 다니며 ‘무일푼 쇼핑’을 즐겼다. 쌀까지 이런 방식으로 샀다. 심지어 자신의 구좌번호와 주소를 알려주며 ‘알아서하라’고 홍보실에 지시하기까지 했다는 후문이다. 견디다 못한 모 백화점 홍보담당자가 해당기자의 ‘횡포’를 <미디어 오늘>에 제보해 기사화됐다. 사내에서도 문제가 돼 이 기자는 결국 경제부를 떠나 편성부서로 자리를 옮겼다는 후문이다.

다시 고개드는 촌지수수

91년 수서사건, 보사부 촌지 사건을 계기로 언론자정 운동이 폭넓게 확산되면서 다소 주춤거리던 기자들의 촌지 수수 관행이 최근 다시 부활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 진원지는 대기업들이다. 정보통신 분야를 중심으로 전반적인 구조재조정 작업에 들어간데다 비자금 여파로 사회적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대기업들의 촌지 공세도 날로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이는 각 기업들의 홍보관리 기능 강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과거에는 삼성, 현대, LG, 대우 등 그야말로 ‘덩치’가 큰 기업들이 기자들을 일상적으로 관리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덩치’는 별로 상관이 없다. 재계 순위도 가리지 않는다. 신문 지상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기업들 대부분이 ‘촌지 생산자’들이다. 대상은 출입기자들 뿐만아니다. 데스크를 포함해 자신들과 직간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이들 기업의 손길이 뻗치기 마련이다.

전자, 유통, 자동차 등 대기업간의 치열한 경쟁양상을 보이고 있는 분야일수록 더 하다. 자동차 업계의 경우 신차 발표회 등 대규모 이벤트를 개최해 판촉과 홍보 욕구를 동시에 충족한다. 백화점 업계도 마찬가지다. 매장 재개업등 ‘만들어진 행사’들이 끊이지 않는다. 신차발표회는 50만원, 백화점 행사는 30만원. 이런 행사에서 기자들에게 건네지는 ‘공식 수고비’라는 것이 일선기자들의 전언이다. 반대로 의류업계 등 사양산업쪽은 불경기탓인지 ‘물’이 좋지 않다.

반드시 ‘현금’만 동원되는 것도 아니다. 요근래 들어서는 상품권, 주유권, 백화점 직불카드 등 신종 촌지도 자주 등장한다. 상품권은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들도 부담이 훨씬 적다.

한 유통업체 홍보실 관계자는 “현금을 거절하는 기자들이 간혹 있지만 상품권은 그렇지 않다”며 “기자 성향이나 행사성격에 따라 현금과 상품권을 선별적으로 나누어 전달한다”고 밝혔다.

지급 방식도 훨씬 세련됐다. 추석, 여름 휴가, 신정, 구정 등 각 시기에 맞는 다양한 방식이 등장한다. 홍보팀과 출입기자들간의 체육대회 등이 그 한 예이다. 삼성그룹 홍보팀의 경우 지난 2월 출입기자들과 농구대회를 가졌다. 경기가 끝난후 참석 기자들에게 최고급 운동복 세트가 전달됐다. 트레이닝 복, 운동화, 농구공까지 들어 있었다. 사전에 기자들의 몸 칫수를 조사했던 것은 물론이다. 중견의류업체인 모그룹사는 지난해 여름휴가를 앞두고 출입기자들에게 ‘캠핑세트’을 돌려 기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출입처따라 ‘각양각색’

기업쪽이 이처럼 ‘대호황’을 누리는데 비해 행정부서 출입기자들 상황은 이와는 다르다. 김영삼 정부들어 돈봉투가 일단은 사라졌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곳이 청와대. 한때 언론자정의 상징적인 출입처로 인식되어오던 청와대의 경우 공식적인 촌지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청와대의 한 기자는 현재의 상황을 ‘빙하시대’로 표현한다. 물론 아직도 ‘잔영’은 남아 있다. 기자들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비서관들이 개별적으로 기자를 챙겨주는 ‘관행’은 여전하다. 대통령 휴가시설인 ‘저도’를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일선 행정관서도 분위기는 비슷하다. 과천의 한 경제부처에 출입하는 기자는 “구정에 장관이 돌린 참기름을 받은게 전부다. 정부투자기관 등에서 술자리를 마련하는 경우는 더러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정도를 넘어선 접대를 받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예전과 비교하면 눈에띄게 맑아졌다는 느낌이다”고 말했다. 그래도 과천 경제부처 기자들은 광화문의 정치, 사회부처 출입기자들보다 조금 ‘풍족’한 편이다. 경제부처들은 허가권을 쥐고 있는 만큼 기업 관계자들의 방문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행정부서 출입기자들은 정부 단위의 공식 외유나 장관 수행 등의 해외취재도 항공비, 숙박비 등은 언론사 부담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기자들은 공무원들이 사정 여파로 주머니가 ‘궁’해진데다 김 대통령이 취임 초기 관급 예산에 의한 기자들의 해외외유 불허 방침을 밝히는 등 ‘돈 문제’에 대해 유난히 ‘청빈’을 강조하는 것이 이러한 분위기의 밑그림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탓인지 민선자치단체장 시대에 들어서면서 지방의 공공연한 촌지 관행도 꼬리를 감추고 있다.

정당쪽의 경우 행정부서와 분위기는 비슷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눈에 띈다. 기자단 단위의 집단적인 촌지는 줄어들었지만 언론사, 기자 개인에 따라 ‘촌지 수수액’이 상당한 격차가 있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에 따라서, 또 언론사의 영향력, 기자 성향에 따라 ‘대접’이 다르다.

가령 신한국당 김윤환 전 대표의 경우 자신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기자들에게 상당한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 선거가 가까와지면서 거물 정치인들의 ‘기자 관리’도 보다 통이 커질 것이라는 것이 정치부 기자들의 전망이다. 돈 많은 신인 정치인들의 ‘돈 씀씀’이도 화제다. 재벌그룹 사장 출신의 한 당선자는 지난 15대 총선을 앞두고 기자들과 점심 식사를 하고 1백만원이든 봉투를 나눠주었다가 일부 기자들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젊은 기자들 돈 되돌리기도

4·11총선 당시 한 야당 대변인실에 근무했던 이 모의원 보좌관은 “두번에 걸쳐 중앙지 30만원, 지방지 20만원씩의 ‘성의’를 전달했다. 일부 젊은 기자들은 돈을 다시 돌려줬다”는 경험담을 털어놨다. 4·11총선 과정에서 여당, 야당 가릴 것 없이 ‘촌지 살포’가 다반사로 이루어졌다. 비교적 베일에 가려져 있는 데스크들의 촌지 수수 관행도 여전하다는 시각이다.

지난 3월 한 언론사 부장이 발행은행과 금액이 각기 다른 수천만원대의 수표다발을 도난 당했다가 범인이 검거된 사실이 밝혀져 돈의 출처를 둘러싸고 갖가지 추측을 낳기도 했다. 무뎌진 자정의식이 낳은 이 시대의 ‘우화’로 기록될 듯 하다. 언론 자정의 기상도가 매우 흐리다는 징후가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