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보도국 국제팀의 야근은 두 명의 기자가 담당한다. 한 명은 국제팀 기자이고 다른 한 명은 다른 팀에서 파견된다. 물론 주공격수는 국제팀 기자. 5월 31일 국제팀 야근 기자는 최명길 기자(36)다. 최기자는 정치팀에서 잔뼈가 굵었다.

국제팀 경력은 2년이 채 못된다. 그러나 최기자는 3년 2개월간의 외무부 출입기자 생활과 워싱턴에서 1년간 연수를 한 경험이 있기에 짧은 경력에도 국제팀 기자로선 베테랑급이다.

야간 근무는 공식적으로 오후 6시부터지만 최기자는 일찌감치 회사에 나온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습관이 그렇게 붙었다.

오후 6시

이제껏 야간 근무를 하면서 별다른 실수 없이 잘 해왔다는 생각이 들지만 야간근무는 부담스러운 게 솔직한 심정이다. 밤 사이에 들어오는 외신을 혼자 판단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빠뜨린 뉴스는 없어야 하는데, 오보도 없어야 하는데 등등 걱정이 앞선다.

이날 저녁 최기자의 주요 임무는 9시 뉴스데스크에서 생방송으로 진행할 일본 김재철 특파원의 월드컵 관련 뉴스를 보조하는 일이다. 이날 저녁 스위스 취리히에서 개최되는 FIFA 집행위원회에서 2002년 월드컵의 공동개최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에 그 결과에 따른 일본측의 반응을 방송하기 위해서다.

일본 특파원의 생방송 시간은 오후 9시10분에서 20분 사이. 뉴스데스크 시간이다.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위성은 일본 지사에서 8시 50분부터 9시 20분까지 위성 채널을 사용할 수 있도록 예약해 두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일본 후지 TV방송국에 방송국 송출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요청도 해야 한다. 더 중요하게는 쮜리히에서 방송사로 직접 날라오는 FIFA 집행위원회 회의 분위기에 대한 정보를 계속 제공해야 한다.

FIFA 집행위원회의 최종 결과 발표는 우리시간으로 오후 11시. 그러나 그 전에 회의장 분위기로 일찌감치 결과를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일본 특파원이 준비해야할 기사도 달라진다.

일본 지사쪽 일에만 신경을 계속 곤두 세우고 있을 수는 없다. 다른 뉴스거리도 찾아야 한다. 평소처럼 영국 로이터 통신 방송, 미국 CNN, CBS 방송 등 국제팀에 설치된 모니터를 주시한다.

AP, AFP 등 세계 유수 통신사에서 보내온 뉴스를 계속 프린터해내는 ‘티커룸’을 들락거리며 새로운 소식이 없는지 문자뉴스도 확인해본다. 하루종일 틱틱 거리는 도트프린터의 소리때문에 국제 뉴스 텔레타이프실은 티커룸이라 불린다.

8시 30분 즈음 ‘삐삐, 삐삐’ 긴급 뉴스가 들어오고 있음을 알리는 부저가 울렸다. 에이전트라 불리는 이 부저는 통신사 측에서 긴급한 뉴스라고 판단해서 알려주는 것이다. 사건, 사고 뉴스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기자는 티커룸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실망스런 표정으로 나왔다. 소식인즉 얼마 전 사우디의 미군기지를 폭파했던 범인들을 사우디 정부가 교수형을 시켰다는 내용. 최기자는 ‘가리봉동에 있는 김씨 아저씨가 알아야 할 뉴스가 아니다’는 말한마디 툭 내던진다. 우리나라와 별 상관없는 뉴스라는 말이다. 뉴스를 선택함에 있어 우리나라와의 이해관계 여부가 주요한 기준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대부분의 외신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통신사나 방송사가 제공하는 것들이다. 국제 뉴스가 미국 등 강대국의 시각이나 관심사에 의해 걸러진다는 사실에 최기자는 불만이다. 그러나 막대한 자본이 투자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방송 뉴스의 경우 어찌 해 볼 도리 없는 두터운 현실의 벽을 느낀다.

그나마 MBC가 가장 애용하는 영국의 로이터 통신의 경우 중립적 시각을 가지려는 노력이 보이기에 다소 위안을 삼는다.

최기자는 이렇게 강대국의 정보질서에 동화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동시에 뉴스를 애국적 관점에서 판단해도 안된다고 본다. 더우기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면 사실을 왜곡할 뿐더러 외국에 대해 적대적 대결 의식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보편적 가치를 찾는 노력이 기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9시 뉴스

8시 50분 위성이 열리자 일본 지사에서 전송을 시작했다. 9시 10분경에 예정된 생방송을 위해 TV에 방영할 밑그림을 편집해 미리 보낸 것이다.

정각 9시, 뉴스는 시작됐다. 최기자는 뉴스데스크의 연출 본부인 뉴스센터에 달려간다. 일본 도쿄지사의 김 특파원이 언제 뉴스 속으로 들어와야 하는지 알려야 하고 위성 수신 상태도 계속 확인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취리히의 현지 생방송이 예정보다 길어진다. 자칫 일본 특파원의 생방송이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9시 20분이면 위성 사용 시간이 끝나기 때문이다. 뉴스 PD가 취리히의 최우철 부장에게 빨리 끝내라고 재촉한다. 최 부장은 이홍구 월드컵 유치위원회 위원장과의 인터뷰를 빨리 끝내려고 안간힘이다. 예정보다 취리히의 생방송이 길어졌지만 일본 특파원의 생중계는 가능하다.

김 특파원의 생방송이 무사히 끝난 후 최기자는 한숨돌렸다. 위성을 이용한 특파원 리포트는 자주 있는 일이라 익숙하긴 하지만 생방송인 경우 끝날 때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다시 5층 보도국 국제팀 자기 자리에 돌아오자 최기자는 워싱턴의 이인용 특파원에게 전화를 돌렸다. 한일 공동개최에 대한 미국 측의 반응을 취재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기 위해서다.

얼마 전 한일사이의 과열 경쟁에 대해 우려한다는 워싱턴의 반응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최기자는 월드컵 개최를 가운데 두고 벌인 한일간의 과열 경쟁이 미국 측으론 상당히 부담이 되었으리라 판단했다. 어느 한쪽에 손을 들어 줄 수 없는 미국의 미묘한 입장이 있기 때문이다.

최 기자는 특파원과 국제부 기자를 투수와 포수에 비유한다. 투수인 특파원이 던져주는 정보를 가공해 뉴스를 만들기도 하는 반면 포수인 국제부 기자가 사인을 보내 특파원이 뉴스를 만들어 보내도록 한다는 의미에서다.

최기자와 이 특파원은 죽이 잘맞는 배터리다. 얼마 전 미국과 한국이 조선(북한)에 4자 회담을 제안할 것이라는 소식을 타 언론사보다 하루 먼저 보도했다. 특종을 낚은 셈이다. 최기자와 이 특파원의 콤비 플레이가 이뤄낸 작품이었다. 이 특파원이 미 국무부측에서 알아낸 정보를 최기자에게 알렸고 최 기자는 외무부를 통해 이를 확인했다.


새벽 두시

라디오와 TV 마감 뉴스용으로 이스라엘 선거결과 최종 발표 소식, 러시아 공군당국의 미그 29기 북한 제공 사실 없음 발표 등 몇 가지 새로운 기사를 편집부 야근 데스크에 넘겼다. 마감뉴스도 끝이 난 새벽 2시. 이쯤이면 한 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이다. 최기자는 국제팀 야근을 나온 경제팀의 고주룡 기자와 함께 보도국을 빠져 나왔다.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서다.

새벽 4시부터 또 다시 바빠진다. 6시 뉴스를 비롯 아침 뉴스에 내보낼 밤새 들어온 새로운 기사들을 정리해야 한다. 특히 이 시간대는 미국이나 유럽 통신사들의 마감시간과 겹치기 때문에 새로운 뉴스들이 많이 쏟아진다.

새벽 5시 경, 기사를 모두 정리, 편집부 야근 데스크에 넘겼지만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5시 40분에 일본 지사에서 아침 뉴스용으로 월드컵 관련 기사를 만들어 위성통신으로 보내기로 했다. 이를 받아서 녹화 해놓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일은 아침에 출근하는 국제팀 데스크 조영민 부장에게 인수인계하는 것이다. 밤새 처리한 기사들의 제목을 보고서로 제출하면 일은 끝이 난다.

보고서를 제출한 최기자는 출근하는 동료들의 인사를 받으며 MBC를 빠져나간다. 그는 회사 건물을 빠져 나가면서 이제부터 자신은 언론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보의 홍수속에서 허우적대지 않기 위해 바싹 긴장해야 하는 기자 생활을 집에까지 연장하고 싶지 않다. 그래야만 기자 생활을 더 충실히 할 수 있다는 것이 10년 기자 생활속에 터득한 지혜다.

아침 9시, 최기자는 부인과 세 아이가 기다리는 일산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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