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건 대치상태가 7일간 계속됐던 80년 5월 광주에서 기자들은 신변상의 위협을 겪었다. 특히 폭도등의 용어로 광주시민들을 언론이 매도하면서 현지 취재기자들은 시민군들로부터 강한 불신을 받았다.

후일을 위해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며 기자들의 취재에 협조적인 시민들도 적지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기자들을 경계하는 분위기였다. 단적으로 광주MBC 건물이 전소된데서 이들의 언론에 대한 증오감을 확인시켜 준다. 외신과 국내언론 보도를 비교하며 기자들을 자주 질타했다.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전남도청 취재를 담당했던 조남준 사회부 부장대우는 월간조선 96년 2월호 기고문에서 조선일보 취재팀 전원이 시민군들로부터 총격을 받을뻔 했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갑자기 문이 열리며 칼빈총을 든 청년 두명이 들어와 ‘손들어’라고 외쳤다. 칼빈에는 탄창이 장착돼 있고 그들의 손가락은 방아쇠에 걸려 있었다. 조선일보 기자들이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광주주재이던 조광흠기자가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했다. 주민등록증을 내보이며 ‘나도 광주시민이다’고 밝힌 것. 그때서야 총부리가 거두어졌다.”

기사송고의 어려움도 고민중의 하나였다. 20일을 기해 광주지역은 전화선이 끊겼다. 기자들은 전화까지 불통인 상황에서 취재한 내용을 본사로 송고하는데 애를 먹었다. 당시에는 전화외에 다른 송고수단이 없었다. 경찰기자를 오래한 기자들은 치안본부에 직통으로 연결돼 있는 도지사실내 행정전화를 이용했다. 이 전화는 치안본부 교환을 통해 서울시내로 연결되는 것으로 광주항쟁이 끝날때까지 살아 있었다.

미처 행정전화를 ‘선점’하지 못한 기자들은 동양통신 텔렉스실을 이용했다. 동양통신 광주지사에는 그래서 항상 기자들로 붐볐다. 경상도 출신 일부 기자들도 취재에 어려움을 겪었다. 마산출신이었던 동아일보의 김모기자는 취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동료기자들의 권유로 서울로 돌아가기도 했다.

광주를 취재하고 돌아온 기자들의 ‘취재노트’도 애물단지였다. 각 신문사 경영진들은 취재기자들에게 취재노트를 올려보낼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정보기관도 탐을 냈다. 실제로 일부 기자들은 이 취재노트나 혹은 복사물을 갖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