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주역들 광주지역 언론계 대거 포진

유인물제작자에서 데스크로

광주항쟁이 끝난 직후 전남매일신문에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라는 시를 게재해 큰 파문을 일으켰던 김준태 시인. 그는 이 시를 게재한 직후 교사직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계엄당국에 연행되는등 고초를 겪었다. 지금 그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은 광주매일 편집부국장석이다. 89년 전남일보 창간과 함께 언론사에 들어와 94년 광주매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신문사엔 유독 5·18 광주세대들이 많다. 정용화 정치부장도 그중의 한명이다. 정 부장은 광주항쟁의 최후 수배자 윤한봉씨의 미국 밀항을 성사시킨 장본인이다. 전남대 교육지표사건(1978년)에 연루되는등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재야활동을 해온 정부장은 전남일보 창간과 함께 언론계에 뛰어들었다.

경제부 김선출부장도 광주항쟁으로 투옥됐던 이력의 소유자다. 70년대 후반 전남대 학생운동 지도부로 활동해온 김 부장은 5·18 당시 투사회보 등 유인물 제작을 담당했다.

이들이 소속돼 있는 광주매일은 ‘정사 5·18’이라는 제하의 대하기획물을 2년간 연재해 책으로 엮어내기도 했다.

광남일보 이재의 논설위원도 80년 전남대 총학생회 기획위원으로 활동하던 도중 광주항쟁을 맞아 그 누구보다 깊숙이 5·18에 관여했다. 이 위원은 계엄군이 도청에서 철수한 5월 21일 곧바로 도청 상황실에 들어가 시민군 입장을 대변하는 유인물 제작을 도맡았다. 그는 80년 10월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위해 지하 유인물 작업을 벌이다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이 위원은 광주일보 월간국 기자로 근무하면서 광주문제등 의식있는 기사를 상당수 썼다. 무등일보 윤목현 사회부장도 80년 당시 전남대 자연대 학생회장을 맡고 있다 5·18직전 예비검속에 걸려 경찰에 연행됐다. 5·18 하루전인 17일이었다. 광주에서 맨 처음 체포된 학생운동권으로 기록돼 있다.

무등일보 경제부 정인서 차장도 광주항쟁으로 구속된 전력이 있다. 전남일보 문화부 임동확기자도 전남대 2학년에 재학중 광주항쟁에 참여해 구속됐다. 임 기자는 시인으로도 활동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5월정신이 시작업의 중요한 화두이다. 전남일보 제2사회부 김중태기자는 형이 계엄군 총격에 사망한 유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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