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20일. 당시 기자협회 집행부는 이날을 기점으로 전면적인 제작거부에 돌입할 계획이었다. 언론검열에 항의하고 언론자유를 보장하라는 것이 주요한 구호였다. 그러나 신군부는 5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내렸다.

이로인해 다수의 언론인들이 연행되고 수배조치를 당했다.20일을 D데이로 잡았던 기자들의 전면적인 저항계획도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중앙일보를 시작으로 합동통신등 일부 언론사의 기자들은 기자총회를 갖는등 집단적인 대응을 모색했다.

순전히 기자적 열정에 의거해 광주로 향한 기자들도 적지 않았다. 분노를 가슴에 안은채 광주를 지켜본 기자들.그리고 이들은 단지 학살의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고달픈 인생행로를 걷는다. 80년 5월 광주를 지켜본 기자들의 체험담을 들어본다.


1980년 5월 19일 저녁 동아방송 사회부 박종열기자(현 동신대 신방과 교수)는 광주행 통일호 열차에 몸을 싣는다. 역사의 소용돌이속에서 한 개인의 고된 역정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스물아홉의 패기만만한 종로서 출입기자이던 박 기자는 전날 광주 출장명령을 받았다.

5·17 비상계엄조치와 함께 한숨도 자지 못한채 상도동, 동교동, 서울대, 고려대를 뛰어다니다 집으로 돌아와 단잠을 자고 있던중 전달받은 취재지시였다. 새벽녘 광주는 ‘폭발’일보 직전이었다.


광주 체험기자 1백여명

박기자는 광주시민군이 도청을 접수한 22일 이후에도 전남도청을 지킨 몇 안되는 기자였다.언론에 대한 거부감이 극한에 달한 상태에서도 광주출신으로 시민군 지도부와 안면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다행히 현장을 지킬수 있었다. 그러나 광주지역은 20일부터 전화불통. 시내 전역이 외부와의 연락이 두절됐다.

박 기자가 떠올린 것은 도지사실의 긴급 행정전화. 다행히도 이 전화는 살아 있었다. 서울과의 연락이 완전히 두절된 상황에서 박기자는 죄책감속에서도 현장분위기를 고스란히 동아방송을 통해 내보냈다. 광주에서 열심히 기사를 보냈다는 것은 그만큼 ‘죄과’가 무거운 것이다.

그리고 한달여 남짓, 종로서 기자실을 지키던 박 기자는 취재도중 정보형사들에게 두 눈이 가려진채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간다. 반공법 위반 및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비상군법회의에 회부된 박 기자는 2년 구형을 받고 3개월간의 형살이를 하다 최종관할관 확인과정에서 형집행면제로 풀려난다. 언론계를 떠난 것은 물론이다. 87년 다시 동아일보에 복직할때까지 타의에 의해 취재현장을 떠나야 했다.

80년 5월 광주를 보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박기자는 옥살이까지하는 인생유전을 겪었지만 마찬가지 이유로 취재현장을 떠난 기자들은 부지기수다. 80년 광주를 목격한 기자들은 대략 1백여명으로 추산된다. 월간조선은 85년 7월 당시 광주에 파견된 기자들의 좌담을 통해 이같은 수치를 제시했다.

현지 지방지 기자들을 제외한 외신기자들과 서울에서 파견된 기자들, 본사 취재진과 함께 현장을 누빈 주재기자들을 모두 합한 숫자이다. 조선일보 4명, 동아일보 5명, 한국일보 4명 등 각 신문사들은 호남 출신 경찰기자들을 주축으로 현지에 급파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80년 11월에 단행된 언론인 대량해직 명단에 포함된다. 광주주재 기자들은 거의 빠짐없이 해직됐다.


기자총회 열어 대표파견도

광주를 취재하게된 사연도 가지각색이다. 대부분은 회사의 지시로 광주로 출발했지만 순전히 기자적 열정과 현장을 지켜보아야한다는 이유에서 광주행을 결행한 기자들도 있다.

동아일보 신동아부에 있던 윤재걸기자(현 광남일보 논설주간)도 그중의 한명이다. 광주에 노부모가 살고 있던 윤기자는 가족들, 가까운 지인들과의 통화에서 현지 상황이 그야말로 파국에 처해있음을 직감했다. 통곡이 배어 나오는 시외전화를 통해 현지 상황을 직감한 윤기자는 현지 취재를 자원하지만 회사에선 좀 더 기다려보자며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동료기자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독자적인 취재팀을 파견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우여곡절끝에 소집된 기자총회에서 2명의 취재팀을 광주에 특파키로 결정했다. 취재경비를 긴급히 모금한 결과 모두 모인돈은 20만원 안팎.

여성동아부의 김광원 기자와 윤기자가 취재팀으로 선발되는 행운(?)을 누렸다. 동료들이 모아준 돈으로 광주로 향하는 두 기자의 심정은 비장했다. 이 가운데 윤기자는 80년 언론인 해직명단의 끝자리를 차지한다.

동아일보내에서 유일하게 사표를 내지 않은채 당한 ‘해임’이었다. 윤기자는 84년 동아일보에 복직된 이후 85년 5월 신동아에 ‘광주, 그 비극의 10일간’을 현장 취재해 이를 기사화한다. 초판 30만부가 전량 매진되는 출판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우지만 윤기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서슬퍼런 권력의 보복뿐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정보기관에 끌려가 3일동안 ‘빨가벗고 맞는’수모를 당한다.

당시 국제신보 사회부 조갑제기자(현 월간조선 부장)의 광주 출장도 특이하다. 부산에서 잘 나가는 사건기자였던 조 기자는 5월 18일 회사에 병가를 내고 광주를 찾았다. 부산에서 성장하고 직장을 구한 탓으로 광주에는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 순전히 기자는 현장을 떠나선 안된다는 일종의 압박감이 그를 광주로 내달리게 했다.

다른 언론사와는 달리 동료기자들도 없는 홀홀단신 취재였다. 23일 광주에 도착한 조기자는 취재기간내내 경상도 사투리를 숨기지 않고 취재를 했다. 그는 “당시 경상도 사람이라는 이유로 취재에 어려움을 겪은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경험에 비추어 볼때 광주사태가 지역감정에서 빚어졌다는 것은 다소 과장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다”고 말했다.

조기자는 본사에 돌아와 광주를 지켜본 다른 기자들과 마찬기자로 해고를 당한다. 병가를 내놓고 취재를 갔다는 다소 황당한 이유였다. 조기자는 80년 11월 언론인 숙정 명단에 또다시 이름이 오르는 ‘이중해고’를 경험했다.

조부장은 “기자생활을 하면서 5·18 취재는 큰 도움이 됐다. 현장과 소문의 차이,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만이 가질수 있는 느낌과 자신감을 절실히 체험했다. 광주 관련 기사를 작성하면서 큰 실수를 하지 않았던 것도 이런 경험에서 나왔다”고 회고했다.

중앙일보 사회부 최승호, 권오중 기자등 경찰기자 4명도 자원해 광주로 내려갔다. 취재지시를 받지 않은채 5·18진상을 파악하기위해 광주로 향했다. 이들은 광주에서 올라온 직후 출입처가 바뀌었다. 특히 7월말 기자전원에게 사표를 제출하라는 지시를 따랐다가 다른 계열사로 전보되거나 사표가 수리되는 불이익을 당했다.


신군부, 언론과 검은거래

기자단이 집단적으로 광주를 방문한 경우도 있다. 국방부 출입기자단과 중앙언론사 사회부장단 등이다. 이들의 광주방문은 순전히 계엄사의 대 언론홍보 전략에서 이루어졌다. 국방부 기자단 15명은 22일 저녁 성남의 군부대 비행장에서 군 수송기편으로 한밤중 광주송정리 비행장에 도착했다. 국방부 기자단은 국군통합병원과 현지 전투사령부를 방문하고 23일 서울로 돌아왔다.

24일 상오 권정달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의 안내로 광주를 방문했던 사회부장단은 통합병원 임시상황실에서 상황설명을 들은후 “시민군들을 폭도로 써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80년 광주에서 의기어린 취재를 감행한 기자들 뒤에서 신군부는 꾸준히 언론과의 검은 거래를 모색했던 것이다.

이밖에도 광주에서 악몽을 경험한 기자들은 숱하다. 보도되지 않을 줄 뻔히 알면서도 취재지시를 내리는 데스크나 ‘사지’로 향하는 기자들 모두 ‘훗날을 기약’하는 무언의 합의가 있었다. 오랜 세월의 ‘금기’를 거쳐 그 기록들은 지금 ‘부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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