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관련 자문을 하다 보면 가장 많은 질문을 받는 문제이고, 또한 답변하기 어려운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실명보도의 문제이다.

기사를 작성하고 게재하는 언론 관계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익명보도는 왠지 김빠진 느낌은 물론 혹시라도 독자들에게 비겁하다는 책망을 듣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법률적으로 크게 책임질만한 문제가 아니라면 실명 또는 익명으로 처리하더라도 독자들로 하여금 누구인지 확인이 가능할 정도의 표현을 사용하고자 하는 유혹을 쉽게 떨쳐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오래전 일이기는 하지만 기자들 사이에 익명보도는 보도가 아니라는 공통의 인식이 존재하던 때도 있었다. 사안에 따라 판단하기 매우 어려운 문제도 엄연히 존재한다.

예컨대 인체에 해로운 물질을 함유한 식품이 널리 판매되고 있다면 문제의 제품이 어느 회사의 어느 제품인지를 독자들에게 급히 알려 피해의 확산을 막아야 하는 것이 언론이 가지는 고유한 사명 중 하나임에도, 무죄추정의 원칙, 피의사실공표죄 등 현행법상 실질적으로 익명보도를 강제하고 있는 제반 규범과의 충돌 상황을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할 것인지가 문제가 되는 경우도 존재할 것이다. 혹은 익명성의 원칙을 엄히 지킨 결과 거꾸로 불의의 피해자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보도의 대상이 되는 사실관계들이 표현의 자유에 있어 이념적 지표가 되는 알 권리의 대상인지 아니면 사회적 관음증의 대상인지가 모호할 때도 있다. 이른바 공인의 사생활과 관련한 보도가 이런 경우이다.

실명보도 막으려다 실명보도 불러

최근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와 관련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 주된 내용이 바로 당사자들의 실명거론과 관련한 문제이다. 초기 상황에서는 인터넷상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리스트가 널리 확산되고 있음에도 실명보도의 문제가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고 익명보도의 원칙은 충실히 지켜졌다. 장자연씨의 유서에 거론된 당사자들이 누구인지 공식적으로 확인을 할 수가 없었던 탓도 있었겠지만, 사실관계 자체의 확인도 어려울 뿐 아니라 유서의 내용 대로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내용이 과연 국민의 알 권리의 대상인 공익적 보도인지도 의문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대 언론사의 위력에 굴복한 자기 검열이라고 보는 시선이 존재하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선해하여 우리 언론의 윤리의식이 상당히 높아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안 자체가 위에서 언급한 이른바 공인의 사생활과 관련한 내용이고 그 사실관계의 확인이 매우 어려운 반면 보도 결과 그들이 입을 명예의 손상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률가로서 시원하게 자문에 응하기 어려운 상황이 그 이후 벌어졌다. 법률상 면책특권을 가지는 국회의원이 대정부질문을 하는 과정에서 리스트의 일부를 공개한 것이다. 면책특권을 갖는 국회의원의 발언을 그대로 인용하여 보도할 경우 언론사의 책임은 어떨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속시원한 해답을 찾기도 전에 새로운 상황이 또 벌어졌다. 리스트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 인사를 사주로 둔 유력 언론사에서 실명을 공개한 국회의원에게는 법률적 조치를 할 것을 알리는 서면을, 그리고 당시 국회를 출입하던 각 언론사 기자들에게는 실명 또는 리스트에 거론된 인사를 특정할만한 표현을 사용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경고문이 보내진 것이다.

또 다른 고민거리가 생겼다. 경고문 등을 보낸 언론사의 실명을 보도한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 독자들이 해당 인사의 관련성을 추론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닌 이상 리스트 상의 실명을 거론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를 빚게 되는데 이런 경우 언론사에 대한 책임 유무는 또 어떻게 판단하여야 할 것인가. 거듭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였다.

이처럼 판단의 어려움은 이후 각 언론사들의 보도태도에서도 쉽게 드러난다. 다수의 매체는 종래의 보도태도를 고수하여 경고문을 보낸 언론사의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일부 스스로 용기있는 언론임을 자부하는 매체는 경고문을 보낸 언론사의 실명을 거론하고야 말았다. 결과적으로 실명보도를 막기 위한 일련의 무리한 조치들이 실명보도를 불러오고 만 것이다.

언론사로선 극도의 신중함 보여야

문제의 유력 언론사는 실명을 거론한 국회의원들과 어떻게 선별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자신들의 경고를 어긴 몇 몇 시민단체 관계자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였다고 한다. 실명보도 혹은 익명보도의 문제는 일률적으로 그 당부를 판단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그러기에 언론이라면 모름지기 이러한 판단의 상황에서 극도의 신중함을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신중함을 요구하는 것을 넘어서서 강제적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그것이 자신이 지금까지 누려왔고 앞으로도 누려야 할 언론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는 행위임은 차치하더라도, 혹여 이 사건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애초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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