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당시 광주항쟁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신군부측의 언론공작은 집요했다. 공포분위기 조성과 회유가 동시에 진행됐다.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 서리겸 보안사령관이 직접 나서기도 했다.

광주항쟁 취재부서인 언론사 사회부장을 대상으로 한 공작에는 전두환 전대통령을 비롯해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 허문도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등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신군부의 실세가 동원됐다. 촌지가 주어지기도 했다.

광주항쟁이 막바지에 접어든 80년 5월24일 언론사 사회부장들은 각사를 출입하던 보안사 요원들로부터 “광주 현지 상황을 보고 오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는다. 말이 제의였지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렇게해서 15명의 언론사 사회부장들이 권정달보안사 정보처장의 안내를 받고 광주로 출발한다. 성남비행장에 모여 군용기를 타고 광주 송정리 비행장에 도착한 이들은 당시 광주통합병원 근처에 있던 계엄군 임시상황실로 안내돼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으로부터 브리핑을 받았다.

현재 언론사 고위간부로 당시 이 자리에 있었던 한 참석자는 “임시상황실에서는 당시 광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는데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고 당시 장면을 회상했다. 권처장은 이 자리에서 “폭도들이 저지른 짓”이라며 “이제부터의 보도는 폭도로 써 달라”고 주문했다.

대단히 강압적인 분위기여서 참석자들 모두 이의를 제기할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얼마간 무거운 침묵이 흐른뒤 한 사회부장이 “폭도라는 표현은 곤란하지 않느냐”고 조심스럽게 문제를 제기했으나 보안사측은 이를 일축했다. 이어 진행된 상황설명은 어떤 반론도 허용하지 않는 공포 그 자체였다.

당시 ‘용기있게’ 반론을 폈던 한 사회부장은 본지와의 전화통화에서 “무기고에 들어가 총기를 탈취한 사람들을 그렇게 지칭하는 것이면 몰라도 광주시민 전체를 폭도로 규정할 수는 없다는게 당시 내 생각이었다”고 발언의 배경을 설명했다.

보안사의 상황설명을 듣고난 뒤 이들은 시민군과 계엄군이 대치중이던 화정동으로 가서 계엄군쪽에서 광주를 살펴본후 서울로 돌아왔다.

귀경직후 이들 사회부장들은 프라자호텔 21층 대연회장에서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겸 보안사령관을 만나게 된다. 프라자호텔은 당시 신군부쪽이 비밀회합 장소로 자주 이용하곤 했다. 이 자리에는 허문도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도 배석했다. 광주에서의 ‘이상기류’를 감지한 신군부측이 사회부장들을 꼼짝못하게 하기 위해 이 모임을 마련한 흔적이 짙다고 한 참석자는 전했다.

이 자리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광주에 다녀온 소감이 어떠냐”고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참석자중 어느 누구도 대답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어색해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목숨을 걸고 이 난세를 극복하겠다”는 등 일방적으로 말을 이어나갔지만 사회부장들의 침묵은 계속됐다

그래서 이 자리는 어색한 분위기에서 금방 끝났다. 참석자들은 “밥만 먹고 나왔다”고 말했다. 이때 사건이 벌어졌다. 문앞에서 참석자들을 배웅하던 허문도 비서실장이 30만원이 든 흰봉투 하나씩을 전달한 것이다. 참석자들에 따르면 “당시 분위기가 거부할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고 전했다.

이날 모임과 관련, 광주시민을 폭도로 모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던 한 사회부장은 “당시 사회부장들은 대체로 양식이 있는 분들이었다. 하루종일 모두 침울해했고 서로에게 말을 건네는 분위기도 아니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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