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사표 ― 우리는 보았다. 사람들이 개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80년 5월20일 전남매일 기자들은 폐간을 각오하고 ‘광주전역공포, 시민전전긍긍/진압군 무차별 난타, 사망 중상자 속출’이라는 제목을 달아 당시 계엄군의 유혈진압 실상을 보도했다. 그러나 ‘광주의 진실’을 보도한 이 신문은 시민들의 손에 전달되지 못했다. 인쇄직전 회사측이 활판을 지워버린 것이다. 그렇게 진실은 묻혀졌다. 그리고 전남일보 기자들은 공동사표를 제출했다.

MBC ‘PD수첩’이 지난 14일 방영한 ‘80년 5월, 그때 언론은 죽었다’는 80년 ‘5월 광주’와 ‘그때의 언론’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80년 당시 계엄사의 보도검열, 이에 저항한 일부 뜻있는 언론인들의 저항의 기록들을 발굴해 시청자들에게 전달한 것이다.

당시 MBC 사회부 기자였던 정동영씨(현 국민회의 대변인, 국회의원당선자)는 광주항쟁 기간중 서울본사에 광주의 모습을 이렇게 보고했다. “어제까지 학생들이 장악을 한 상태에서 시민들은 전혀 불안감이 없었다. 밤에는 총소리때문에 공포에 떨었지만 낮에는 생활의 지장을 전혀 안받았다. 광주시내의 표정은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가 만발한 도시였다.”

은 그러나 현장 취재기자들의 이같은 상황인식과 목소리는 “전체 언론의 침묵속에 묻혀버렸다”고 지적했다.

이날 에는 박정희대통령이 사망한 직후인 79년 10월30일부터 광주항쟁까지의 계엄사의 언론보도 검열지침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김성수 전한국일보 사진기자가 편집국 칠판에 매일 적히는 보도지침을 사진으로 찍어 보관한 이 자료에 따르면 당시 신군부는 최규하대통령 권한대행의 동정에 대한 보도조차 금지시키는 등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았다.

광주항쟁과 관련해서는 △시위자들의 협상 요구 사항 △인명피해, 사상자 처리에 관한 개별취재 내용은 보도할 수 없도록 했다. 반면 △시위자들의 방화·약탈·살상·점거·선동 △시위자들의 자수, 안정회복 권유 관련사항은 적극적으로 보도토록 해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시민의 목소리가 국민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철저하게 봉쇄하고 왜곡했다.

이 검열지침은 또 △최규하대통령권한대행의 동정은 절대 엄금(79년 11월11일) △‘최대행 대통령추대’ 제목에서 삭제(79년 11월24일) △경제불안 비판하지 말라(80년 1월30일) △김대중 회견기사 머릿기사로는 불가(80년 3월1일)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