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와 기이치부터 미야자와 리에까지.’
도쿄특파원들은 자신의 취재범위를 일컬을 때 흔히 이런 표현을 쓴다. 이 표현은 특파원들이 일본 총리에서부터 연예인의 사생활까지 전방위로 취재를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 시절 미야자와 리에라는 연예인이 인기를 끌었던 사실에 빗대어 만들어낸 말이다. 독도, 선동렬, 일본 국회해산, 북일관계 등 도쿄특파원들의 하루는 매일같이 다른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서울신문 강석진특파원(39)은 ‘미야자와 기이치부터 미야자와 리에까지’ 취재해야 하는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위해 아침 6시30분 일본 도쿄도 미나토구 코난, 통칭 시나가와로 불리는 자신의 집에서 눈을 뜬다.

눈을 뜨자마자 그가 처음 하는 일은 일본의 조간신문을 체크하는 일. 아사히, 요미우리, 마이니치 등 6개의 조간신문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오늘 취재할 방향을 가늠해본다. 도쿄특파원 생활을 시작한지도 어언 1년 9개월이 지났지만 모국어로 쓰여지지 않은 신문을 이렇게 아침마다 여섯 종류씩을 읽어내긴란 실로 벅찬일이 아닐 수 없다. 조간을 보는 가운데 30분 가량 진행되는 7시 NHK뉴스도 빠뜨릴 수 없는 순서다.

이렇게 9시30분까지 분망한 시간을 보내야 10시경 이뤄지는 서울본사 보고가 알찰 수 있다. 스트레이트기사, 상자기사, ‘오늘의 눈’ 코너 아이템을 전화로 부른 뒤 집에서 멀지 않은 주니치도쿄신문에 마련된 특파원 사무실까지 걸어서 출근하면 10시30분. 같은 층을 쓰는 도쿄신문 광고국 직원들은 강특파원이 해가 중천에 떠서야 출근한다며 가끔 ‘도노사마(전하)’라는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출근하기 전 어떤 격전을 치러내는지는 모르고 하는 소리다.

두평 남짓한 특파원 사무실에 책상 하나와 소파가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사이에 강특파원에게 빼놓을 수 없는 취재수단인 닛케이텔레콤 제공 기사를 검색하기 위한 컴퓨터와 TV가 놓여 있다. 그 옆에 남은 짜투리 공간 한쪽엔 서울신문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신문과 일본의 신문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이 곳이 그가 일본이란 거대한 나라를 바라보는 창인 것이다.

그는 도와주는 사무보조원이 따로 없기 때문에 잡무도 자신이 처리해야 한다. 전화 받고 팩스 정리하는 일에서부터 한국관련 뉴스를 물어올 때 설명해주는 일, 일본관련 인터뷰나 기고문이 실린 신문을 발송하는 일까지 자신이 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넓게볼때 깊게 본다” 온몸 체득

도쿄신문과 강특파원이 있는 이 시나가와 지역은 우리나라 사람에겐 각별한 감정이 느껴지는 곳. 이 지역은 에도시대 성밖의 천민들이 살던 곳으로 일제시대를 전후해 일본의 정규사회에서 밀려난 우리나라 교포들이 삶을 개척하던 곳이다.

교포들은 이 척박한 터를 바탕으로 이 지역에 무성했던 갈대처럼 억척스런 생명력을 키워나갔다. 현재 일본인이 가장 즐겨먹는 음식 가운데 하나가 된 ‘야끼니꾸(燒肉)’, 즉 불고기의 전파지도 이곳이다.
강특파원이 일본생활을 하면서 절감한 것 가운데 하나는 이런 교포들의 애국심. 이에 반해 우리나라가 이들에게 보여준 관심과 애정은 턱없이 모자란 것이었다.

강특파원은 이들을 비롯해 미국, 중국, 러시아 등 우리나라를 둘러싼 4강에 고루 퍼져 있는 교포들의 애국심과 잠재력을 우리나라가 얼마나 잘 보듬어 안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국운이 크게 좌우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특히 60만의 교포가 온갖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국적을 버리지 않고 일본에서의 참정권 획득을 위해 투쟁하는 현실에 대해 우리 언론이 더욱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통신으로 처리할 기사와 직접 쓸 기사를 분류하고 나면 점심시간. 강특파원은 점심식사는 주로 현지 취재원들과 함께 하려고 한다. 직접 취재가 현실적으로 거의 힘든 조건이지만 많은 일본내 인맥을 만들어둬야 정보에 대한 확인과 이미 보도된 기사의 사실여부에 대한 검증이 가능하다.

그러나 일본에서 인맥을 만들기란 쉽지 않은 문제다. 우리나라는 한번 사귀었던 사람이면 5년만에 다시 만나도 다정한 사람이지만 일본사람은 끝없이 관심을 표명하지 않고는 관계가 지속되지 않는다. 이런 만남에서 때때로 ‘핫뉴스’를 건져내기도 하지만 주로는 ‘끊임없는 안면 익히기’의 일환이다.

기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지위도 우리나라완 딴판이다. 우리나라는 기자라는 신분 그 자체가 갖고 있는 프리미엄이 있어 취재가 비교적 수월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일본은 기자가 관공서의 과장급 간부도 만나기 어려울 만큼 사회적 지위가 우리나라보다 낮다.

일본 기자사회에선 수습시절 경찰서를 출입할 때 서장과 수사과장의 부인 생일을 몰래 알아내 선물을 하는 것을 중요한 통과의례의 하나로 여긴다. 수습시절 서장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가는 등 호기를 부리는 한국의 기자문화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문화 탓인지 일본 일간지를 보면 정치를 알 수없다. 예를 들어 한 기자가 오자와를 취재하면 그 파벌의 일원 비슷하게 취재를 할 수 밖에 없다. 그 파벌을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간 그 다음날부터 취재가 불가능해진다. 그 파벌에게 불리한 뉴스가 있을 경우 기자가 심지어 일선 데스크에게 보고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일본 정치의 이면을 보기 위해선 정확도가 떨어지긴 하지만 주간지를 참조해야 한다.

“멀고 먼 ‘취재인맥 만들기’

그러나 이런 문화가 병폐만 낳은 것은 아니다. 일본은 오보에 대해 상당히 엄격하다. 실제로 기사의 정확도가 99%라고까지 평가된다. 확인되지 않아도 다른 신문 가판에 기사가 실리면 베끼는 관행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확한 확인이 되면 다른 신문에 실렸던 기사라도 뒤늦게 싣는다.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주제에 대해 지속적 관심을 표명하는 것도 일본언론의 미덕이다. 우리 언론이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등의 사건에 대해 반짝 관심을 보였다 이내 잊어버렸던 것과 달리 일본 언론은 옴진리교, 한신대지진 사건등을 무려 1년간 지속적으로 추적하고 보도했다. 이런 한일간의 언론문화의 차이가 특파원들에게 질곡으로 작용할 때도 있다. 이런 차이 때문인지 본국과 현지 특파원간에 사이클이 맞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소유와 경영이 철저히 분리된 것도 일본언론의 장점 가운데 하나. 작년에 강특파원이 사무실을 쓰고 있는 주니치도쿄신문 회장이 사망했는데 그의 생전의 별명이 ‘덴노헤이카(천황)’였다. 그는 소유주 출신이 아닌 평기자 출신 회장이었지만 우리나라와 달리 신문에 대한 권한은 소유주보다 더 막강했다. 오히려 소유주가 그 밑에서 아무런 불만없이 일을 배웠다. 비단 주니치도쿄신문만이 아니라 다른 신문에도 이런 기자 출신의 회장이나 사장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오늘은 특별히 한국대사관 주재의 오찬이 있는 날이다. 그동안 같은 도쿄 안에 살면서도 만나지 못한 우리나라 특파원들을 만나 회포를 풀기도 했다. 과거엔 특파원들이 대사관 기자실에 모여 정보교환도 하고 논조에 대한 상의도 하는 등 빈번한 만남을 가져왔으나 요새는 각 언론사마다 별도의 사무실을 운영, 좀체로 만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 이런 만찬이 아니면 특파원 환송회 때 모이는 게 전부다.
“특파원 아닌 도쿄 주재기자”


점심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면 오후 2시∼2시30분. 오전 중에 처리하지 못한 기사를 쓰고 점심식사 동안 체크하지 못한 뉴스를 닛케이 텔레콤을 통해 검색한다. 그리고 3시 NHK, 3시30분 TV아사히 TV도쿄, 3시50분 니혼TV, 다시 4시 5시 NHK 뉴스까지 샅샅이 훑어내려 간다.

석간을 보는 것도 이 시간대다. 뉴스를 보는 중간중간 취재원에게 전화를 통해 확인하고 송고할 기사도 쓰고 그야말로 한사람의 몸을 ‘멀티화’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간이다. 보통 6시면 최종점검이 끝나는데 오늘은 6시 NHK뉴스를 통해 ‘북한노동당 대표단 27일 방일’ 뉴스가 나와 다시 기사를 써 송고를 했다. 이렇게 강특파원이 보낸 기사는 다음날자 서울신문 1면 좌상단 4단과 6면에 각각 실렸다.

직접취재가 아닌 신문, 방송, 통신을 통한 2차 취재에서 유의할 점은 ‘우리나라의 시각’을 갖는 것이다. 강특파원은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기사의 가치를 평가하고 판단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다그친다. 창이 보는 사람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보이는 대상에 빠져버렸을 때, 특히 그것이 국가간의 이해가 걸린 첨예한 사안일 경우 이미 그것은 창이 아니기 때문이다.

7시뉴스까지 체크한 뒤 집으로의 귀가. 강특파원은 이렇게 사무실과 집을 도보로 오가는 15분여간이 가장 여유롭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한동안 집도 그에게 위안의 장소가 되지 못했었다. 타국생활에서 문화적 충격에 시달리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파김치가 된 몸과 마음을 다시 움직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특파원으로 부임해온 초기 아이를 한번은 보육원에 맡기러 데려간 적이 있었는데 아이가 떨어지지 않으려 하고 헤어져서도 멀어져가는 아빠를 보이지 않을 때까지 쳐다봐 그날 하루내내 가슴이 저민 적도 있었다. 강특파원은 가끔씩 ‘나는 누가 위로해줄까’ 하는 생각에 쓸쓸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강특파원에겐 이런 쓸쓸함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요즘 우리나라에 있을 때는 볼 수 없었던 세상의 이모저모와 남북관계 현실의 이면을 이곳에서 발견하고 있다. 불혹의 나이에 이르러 ‘넓게 볼 때 깊이 본다’는 격언을 새삼 몸으로 체득하고 있는 셈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