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기간동안 언론은 변화를 요구받았다. ‘제도언론’이란 치욕의 꼬리표가 붙기도 했다. 유신에서 5, 6공으로 이어지는 폭압의 정치상황에서 언론은 불의한 권력의 동반자였다. 많은 기자들이 자괴감과 분노와 울분을 술로 삭였다. 권인숙씨의 성고문 사실을 알고도 이를 기사로 쓰지 못했던 MBC의 한 기자는 훗날 “나는 인간이 아니었다”는 참회록을 쓰기도 했다.

이보다 더 심하게 가슴앓이를 했던 사람들이 있다. 독재를 거부하고 이에 저항하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언론의 한 구석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다. ‘운동’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언론을 선택한 사람도 있고, 생업의 방편으로 언론의 문을 두드린 사람들도 있다. 그 이유가 어떠하든간에 이들이 겪었을 고민과 속사정이 남달랐을 것임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역사와 사회를 가슴에 품었고, 그것의 올바름을 위해 한때 모든 것을 걸었었기 때문이다.

그 ‘힘든 세월’을 이들은 어떻게 견뎌냈는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았던 6월항쟁 9돌을 맞아 이들을 만났다.

높은 장벽에 운동권 출신 극소수

‘운동권’ 출신 기자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한겨레신문에 상당수가 몰려있고 그밖의 언론사는 서너명 정도가 고작이다. 그만큼 언론사의 진입장벽이 높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70년 이후 정보기관은 이들이 영향력있는 기관으로 진출하는 것을 봉쇄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20년에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던 중앙일보 이근성문화부장은 “당시 중앙정보부는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언론사에 들어가는 것을 통제했다”고 술회했다. 70년대나 80년초까지는 그래도 바늘끝만한 틈새라도 있었다.

신원조회가 그렇게 철저하지 못했고, 실형전과가 있더라도 ‘보증인’을 잘세우면 입사가 가능했다. 이른바 긴급조치 세대 몇몇의 언론계 입문은 이런 틈새를 비집고 이루어졌다.
그러나 80년대 중반으로 넘어서면서 사정은 전혀 달라졌다.

지금은 모언론사 정치부에서 중견으로 활약하고 있는 C모기자는 전력이 문제가 돼 면접에서만 6번이나 떨어졌다. 그가 언론계에 발을 붙일 수 있었던 것은 다른 곳에서 먼저 경력을 쌓은후 경력기자로 스카웃됐기 때문이다.

현재 언론사는 최종 합격자를 발표하기 직전 관계기관에 신원조회를 의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언론사의 경우 내부적으로 ‘6개월이상 실형’은 안된다는 규정을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시국관련 사건에서 6개월 이하 실형을 선고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전대협등 최근 학생운동 출신들은 언론계에서 눈에 띄지 않는다.

“별로 한 게 없어 부끄럽다”

“이렇게 사는게 아닌데라는 생각을 매일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힘을 모아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한국일보 김주언기자의 이 말은 운동권 출신 기자들의 정서를 대변한다.

짙어만가는 어둠, 그러나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었다. “뭔가 할 일이 있을 것이다”고 생각했던 이들의 초기 문제의식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의 벽에 밀려 점점 퇴색해갔다. 그리고 기자는 점점 ‘생업’으로 변모해갔다.

언론계내에서도 이들의 행동반경은 극히 제한됐다. 5, 6공 내내 이들은 정치부의 경우 아예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이들은 대개 문화부, 국제부, 편집부, 출판국등에 배치됐다. 시국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곳은 경찰서 출입 정도가 고작이었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1년 가까이 복역했던 Y기자는 “사건을 하나 만들고 튀고 싶었다. 동아투위나 조선투위가 했던 일을 만들 생각도 했다. 문제있는 기사를 한 건 쓰고 그것이 보도가 안되면 기자총회등 집단적인 움직임을 조직한다는 그림을 그렸다. 지나놓고 보면 너무 순진했다. 3, 4년차 기자가 만들어낼 수 있는 ‘사건’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희망이라도 없었으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고 말했다.

검찰기자로 86년 해직된 언론선배들이 관련된 보도지침 사건을 취재했던 한 조간신문 기자는 “법정을 취재하면서 왜 내가 저 ‘영광의 자리’에 서지 못했는가를 두고두고 후회했다. 나도 보도지침을 알았고 그것을 모을 수 있었고 또 폭로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못했다. 그걸 모으면 세상을 뒤흔들 사건을 만들수 있다는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겁에 질려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취재과정에서 이들은 대체로 익명을 요구했다. 일반적인 취재원이 흔히 그러하듯 ‘익명의 그늘’에 숨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별로 한게 없고 그래서 부끄럽다”며 자신의 이름이 나가는 것에 대해 손을 저었다. 특히 87년이후 언론운동을 활발하게 펴오고 있는 언론사노조에 누를 끼칠 것을 가장 염려했다. “실제로 한 일이 없는데 마치 배후조종이나 한 것처럼 이름이 오르내려 곤란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익명 요청은 이들이 언론현장을 살얼음판처럼 조심스럽게 헤쳐왔음을 보여준다. 세상이 많이 달라진 지금도 여전히 이들의 행동은 조심스럽기만 하다. 이름이 나갈 경우 동료, 후배, 또는 출입처의 사람들이 자신을 이제까지와 다른 눈으로 볼 것을 염려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전혀 아무일도 못했던 것은 아니다. 편집국 단합대회나 술자리에서 모아진 결의를 토대로 몇몇 언론사에서 △언론기본법 폐지 △기관원 출입 금지를 요구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지금이야 별 것 아니지만 그때는 해직이나 투옥까지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몸을 내던져야 하는 일이 있을 때 이들은 기꺼이 총대를 메기도 했다.

해직기자들이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만들고 말지를 창간할때 돈을 모아주는 등 은밀하게 이를 돕기도 했고 87년 언론사에 노조가 만들어질때 주역으로 나서기도 했다. 또 한겨레신문 창간후 자리를 옮긴 운동권출신 기자들도 여럿이다.

언론계 입문 동기 다양

이들 운동권 출신 기자들의 언론입문 동기는 다양하다. 민청학련 이전 세대의 경우 학교에 남거나 그렇지 않으면 언론계로 눈을 돌리는게 일반적인 분위기였다고 한다.
한 기자는 “뚜렷이 갈 만한데도 없었다”고 말했다. 뒤에 눈길을 둬봤자 들어갈수 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밑져야 본전이다”는 생각으로 문을 두드린게 의외로 성공한 사례가 많다.

80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서울의 봄을 주도했던 MBC 심재철기자는 면접 과정에서 당시 전무였던 이수정씨(청와대 대변인등 역임)가 “저런 친구도 하나정도는 있는게 좋다”고 해 입사할 수 있었다.
중앙일보 이근성문화부장의 경우 10. 26 직후 중앙일보에 입사했는데 “회사가 전력을 다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들어와서 보니 아마 몰랐던 것 같다”며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이부장은 입사과정에서 함께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됐던 안양로씨(현재 신한국당 대전 중구지구당 위원장)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 “중앙일보에 시험치자는 말은 안선배가 했어요. 두명을 뽑는다기에 응시를 했는데 저는 붙고 안선배는 떨어졌어요. 그래서 안선배는 뒤에 기자협회 편집국으로 들어갔는데 5.18 이후 기자협회 제작거부 사건과 관련해 물고문을 받는등 심하게 당했어요. 얼마나 미안한지….”

80년 이후 입사한 기자들은 그 이전 세대에 비해 보다 목표가 분명했다. 대단히 추상적이고 실제 그러지도 못했지만 언론에 교두보를 만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뭔가 할 일이 있다고 믿었다”는게 이 시기에 입사한 기자들의 대체적인 분위기였다.

87년 6월항쟁후에는 대학가에 언론계에 조직적으로 진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들은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언론사 시험에 대비했고 또 입사에 장애가 되는 전과를 만들지 않기 위해 몸조심을 했다.

한겨레,민주화투쟁‘경력’인정도

같은 운동권 출신이지만 한겨레신문에 속한 기자들은 다른 언론사에 속한 운동권출신 기자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정치상황이 많이 달라진 88년 이후에 언론에 입문했고 또 민주화운동 전력을 당당한 ‘경력’으로 인정해주는 분위기에서 기자생활을 한 것이다.

민통련 정책실 간사,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원으로 일하다 88년 창간멤버로 한겨레에 들어온 윤석인기자는 “계층, 직장조직을 건설하고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당시 운동진영내에 제기됐고 이를 실천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던차에 마침 한겨레에 있던 한 선배가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을 해서 들어오게 됐다”고 말했다. 한겨레에 근무중인 운동권출신 기자들의 입사경로는 대개 윤기자와 비슷하다.

약간의 입장차이는 있지만 한겨레신문을 진보적인 논조를 유지하면서 국민들에게 영향력 있는 언론사로 만들려는게 이들의 목표다. 경제적으로는 ‘더 이상 손을 벌리지 않고’ 자립하는 것이다. 윤기자는 개인적으로 “한겨레신문이 민주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는 야심을 갖고 있다.

운동권 출신에 대한 비판도 있다. 너무 뜨겁게 달아오르고 너무 빨리 식는다는 것이다. 편향이 심하다는 지적도 있다. 분명히 달라진 정치상황의 변화를 “뭐가 달라졌느냐”며 극단적인 거부감을 보이는 경향이 있는 반면 “김영삼정부가 잘하고 있지 않느냐”며 뒷짐을 지는 또 다른 극단의 모습이 그것이다.

그간 수차례의 정치적 변화를 거치면서 이들 운동권 기자들을 대체로 치열한 직업의식을 가진 언론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정립해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언론을 운동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평생직장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언론운동의 공간이 상대적으로 넓어진 것도 이들의 변화에 촉매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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