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들에게 전해 주십시오.” 지난 5월 23일 ‘월드컵 유치위’의 구평회 위원장은 프레스센터에서 긴급 ‘기자간담회’를 갖고 기자들에게 A4 용지 한장의 공문을 쥐어 주었다. 월드컵 유치와 관련한 언론보도에 대한 당부가 담긴 내용이었다.

“최근 각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FIFA 집행위원들의 지지성향 분석은 우리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깊은’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이를 고려해 과열 보도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월드컵보도에 대해 ‘깊은’ 우려를 금할 수 없고 이러한 보도들이 월드컵 유치 활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이 공문의 주요내용이다.

“과열보도 자제”공문도

구 위원장이 허겁지겁 기자간담회를 요청하게 된 계기는 전날 각 신문에 일제히 보도된 국제축구연맹(FIFA) 집행위원들의 한일 지지성향 기사 때문. 지난 5월 22일자 동아일보와 한국일보 등 일부 종합일간지와 스포츠지는 ‘국내전문가’들의 예상을 토대로 판세분석 기사를 실었다.

동아의 경우 한국을 지지하는 집행위원들이 9명, 일본 지지가 8명, 부동표 4명으로 한국이 근소한 우세를 보이고 있다고 1면에 머릿기사로 내보냈다. 한국일보 등 일부 신문은 축구공에 각 집행위원들의 얼굴을 넣고 이들의 지지성향을 ‘확정적’으로 기사화했다. 동아일보는 41판까지 3면을 차지하고 있던 월드컵 지지성향 보도를 최종 시내판에서 돌연 1면으로 ‘키우기’까지 했다.

그러나 각 언론들이 근거로 제시한 ‘국내전문가’들의 예상은 유치위원회 관계자들의 ‘희망’이 담긴 추측 발언이라는 게 속사정을 아는 관계자들의 얘기이다. 그 누구도 이를 제대로 확인할 만한 증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일본의 표 분석은 우리와 큰 차이가 있다. 12대 8로 일본우세를 점치고 있다는 후문이다.

이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집행위원들의 속마음을 아전인수식으로 한국언론이 해석할 경우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일본이 이를 ‘역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월드컵 유치위원회의 걱정이다. 실제로 일본은 국내 언론보도를 집행위원들에게 보내고 막판 공격자료로 활용하고 있다는 소문도 나돈다.

구 위원장은 이날 기자들에게 “월드컵 보도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그럴싸하지만 전체를 뜯어보면 틀리는 경우가 많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자칫 과열기미를 보이던 각 신문들의 월드컵 보도는 이 간담회를 계기로 ‘진정 기미’로 접어들었다. 특히 한일 공동개최 문제가 막판 쟁점으로 부상하면서 이러한 움직임은 수그러들고 있는 추세다.

그러나 안심하기엔 이르다. 월드컵 유치결정이 오는 6월 1일로 다가오면서 각 언론사가 ‘총력 태세’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TV 3사가 당일 21시간 공동 생중계를 계획하고 있는 것을 비롯해 그간 월드컵 보도를 ‘주도’해온 방송사들의 거센 경쟁이 예고돼 있다.

각 신문사들 역시 ‘사운’을 건 일전을 준비중이다. 한 스포츠지 기자는 “깜짝 놀랄 기획물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비밀”이라고 말했다. 사장들도 직접 전쟁을 독려중이다. MBC 강성구 사장은 21일 ‘월드컵 방송 편성점검회의’ 자리에 참석해 “MBC가 월드컵 유치에 국내 어느 방송, 언론사보다 앞장섰고 또 기여했음을 국민들의 뇌리에 깊이 새길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체육부 데스크들도 ‘보다 많은 지면’을 배정해 달라고 간부진에 요청해놓고 있는 상태이다. 언제든지 과열경쟁이 되풀이될 ‘충분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지난 26일 나가누마 일본 축구협회장 겸 월드컵 유치위 부위원장이 ‘일본도 공동개최를 수용할 의사가 있다’고 발언했다고 한 한국언론의 보도 내용을 정면 부인한 것도 이러한 후유증의 한 사례로 지적할 만하다. 이 보도는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막판 유치활동을 벌이고 있는 한일 양국 관계자들의 ‘아전인수식’ 발언을 여과 없이 곧바로 보도하면서 빚어진 해프닝이었다.

이 보도는 국내 관계자가 나가누마 회장의 발언 내용을 현지에 나가 있는 풀기자들에게 확대해석해 제보한 것을 ‘일본이 수세에 몰리자 공동개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한 것으로 단정적으로 보도한 측면이 강하다.

방송, 홍보단으로 전락

월드컵 유치가 마치 한국사회 절대절명의 과제인양 부각되고, 특히 우리의 상대자가 일본이라는 점에서 한국언론의 ‘흥분’은 예전부터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흥분’은 이해할 수 있는 ‘구석’이 적지 않다. 국민의 관심과 열기가 그 어느때와 다르기 때문이다.

한 종합지의 축구담당기자는 “취재현장의 분위기가 뜨겁다. 현실적인 조건이 이런 상황에서 언론만 탓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언론의 역할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을 무시하기는 어렵다”는 고민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런점에서 한국언론의 ‘과열경쟁’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시각’과 ‘방향’이다. 한마디로 낙제점이라는 지적이다. 과연 월드컵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는지, 유치과정에서 문제점은 없는지 냉정하고 차분하게 따지는 보도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와 ‘어떻게’는 없고 ‘반드시’만 있다는 얘기다. 이같은 경향은 신문 보다는 방송이 유독 심하다는 평가들이다. 방송에 대해선 ‘월드컵 유치위의 홍보단’으로 전락했다는 비아냥까지 나돌 지경이다.

실제로 월드컵 유치경쟁 이면에 드리워진 ‘그늘’은 적지 않다. 지난 4월초 중앙일보 체육부에 브라질 한인교포 한 사람이 찾아왔다. ”한일 간의 월드컵 유치경쟁 여파로 13만 브라질 교민들이 생업에 지장을 겪고 있다”는 호소를 하기 위해서다.

브라질 출신인 아벨란제 FIFA회장이 일본을 지원하자 한국이 브라질을 적대국인양 취급하면서 반한국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 이 관계자의 전언이었다. 엉뚱한 사람들이 ‘월드컵 유탄’을 맞고 있었던 것이다. 우여곡절을 거쳐 브라질 교포들의 고민은 지난 5월18일 한국어판 ‘아벨란제 자서전’이 출판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했다. 순전히 ‘브라질 교민 보호용’으로 펴낸 것이다.

월드컵 유치에 따른 경제적 이득도 생각보단 낮아질 가능성이 높다. 유치 과정에서 한국측이 수익금의 80%를 아프리카 등 후진국 개발자금으로 내놓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유치경쟁이 외교전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정치적 부담도 만만치 않다.

정치권의 기류도 관심사다. 월드컵 유치가 정몽준 의원이나 이홍구 신한국당 대표의 대권구도와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이미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월드컵 유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집권세력의 움직임도 더욱 노골화된 경향을 보이고 있다. 마치 히틀러가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베를린 올림픽을 유치한 것이나 5공 정권이 정권안보 차원에서 서울올림픽을 이용했던 것과 별반 다를 것 없는 형국이다. 그럼에도 언론의 보도는 ‘월드컵 청사진’ 제시에 주력하고만 있을 뿐 반대의 시각에서 월드컵 유치를 점검하려는 노력은 상대적으로 소홀하다는 평가이다.

““냉정하고 침착할때”

이런 점에서 일본의 유력지인 아사히 신문이 26일 사설을 통해 자신들의 국론과는 다른 입장인 ‘한일 공동개최안’을 지지하고 나선 것은 눈 여겨 볼만한 구석이 적지 않다.

성균관대 이효성교수(신문방송학)는 “월드컵이 정치적 목적에 이용당하듯이 언론보도 역시 이러한 가능성을 늘 경계해야 한다”며 “필요이상으로 부풀려진 열기를 식히고 유치가 결정된 이후의 후유증에 더 관심을 가져 줄 것”을 주문했다. 그는 월드컵 보도가 한국언론의 스포츠보도 수준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며 이번 기회를 한층 더 진일보된 스포츠 보도로 만들어가는 실마리로 삼을 필요가 있다는 진단도 내렸다.

현업 언론인들도 걱정반 기대반의 주문을 내놓고 있다. 중앙일보의 전종구 체육부 차장은 “그 어느때보다 ‘사실지상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과도한 추측·예단은 금물이다. 월드컵 문제가 스포츠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원칙을 갖고 진지하게 접근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맹목적 애국주의의 함정을 냉철함과 침착함으로 극복하자는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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