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을 현실의 거울에 비유하는 담론은, 이제 낡은 교과서 투의 강변쯤으로 떨어져 가는듯이 보인다. 누군가의 말처럼 언론은 가히 ‘현대의 셔먼’이 되어 간다.
이제는 오히려 언론이 현실의 거울이 아니라, 현실이 언론의 거울이라고 비유하는 편이 옳을 법하다는 생각마저 억누르기 어렵다. 그만큼 오늘의 언론은 그들의 뜻대로 현실을 이끌어가고자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따라서 그만큼 현실과 언론의 거리는 멀어지고 골은 깊어지는 것이 아닌가.

가령 언론의 담론과 시정의 담론을 견주어보더라도 그렇다. 지난해도 저물어가던 무렵, 어떤 재벌의 총수는 정계입문의 출사표와 함께 참으로 대담무쌍한 한마디를 내던졌다. “정경유착으로는 모자라다. 정경일치가 되어야 한다.” 거두절미의 흠은 있지만, 그의 한마디는 분명히 그렇게 간추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물론 꽤 먹물이 들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자리였지만, 나는 그 무렵 이런 저런 모임에 어울릴 때마다 어쩔 수 없이 그 한마디를 둘러싼 담론에 휩쓸렸던 것을 기억한다. “그 지긋지긋한 정경유착도 모자라 정경일치라니!” “모골이 송연하다!” 저마다가 쏟아내는 열변에 자리는 뜨거워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정경유착을 일관되게 질타해온 이땅의 언론은 잠잠할 뿐이었다. 그 재벌의 총수는 익히 아는대로 지난 번 총선에서 여당의 후보로 당선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그가 ‘언행일치’의 사람임을 입증하는 후일담을 남기게도 된다.

그 하나가 전직 대통령의 검은 돈을 간수해주고 또한 세탁해주었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하나가 선거자금이 담겼으리라는 의혹이 짙은 ‘사과상자’를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수법으로 실어날랐다는 사실이다. 마침내는 그 ‘사과상자’의 수송작전을 추적한 KBS의 <추적 60분>이 사장의 지시로 방영될 수 없었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나는 구태여 언론의 감시기능을 말하고 싶지 않다. 후일담을 넘는 불씨를 왜 다스리려하지 않고, 더 타오를 수 있는 불씨로 남겨두었느냐는 물음을 던져보고 싶지도 않다. 오로지 언론의 담론과 시정의 담론이 갖는 거리와 골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구태여 욕심을 부린다면 언론의 담론과 시정의 담론중, 그 어느 편이 보다 ‘언론적’이었다던가를 되새겨 보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요즘 이런 저런 자리에 어울리게 되면 단골 메뉴와도 같은 담론에 휘말리게 된다. 이른바 노사개혁위원회의 위원장이라는 분이 내뱉았다는 한마디가 그것이다. “교직은 성직이다. 그분들이 노동자로 전락한다는 것은 회의적이다.”

재벌총수의 경우와는 달리, 이번엔 먹물장이임을 거부하는 사람들마저 열변을 토한다. “노동자가 전락의 대상인가!” “그 성직자라는 선생님들은 노동은 신성하다고 가르치지 않는가!” “노사개혁위원회의 전도가 뻔하다!”

그러나 달아오른 시정의 담론에도 불구하고 이번 역시 언론의 담론은 좀처럼 들려오지 않는다. 짜장 ‘선우후락(先憂後樂)’을 따르고자, 걱정이 버릇이 되어버린 나는 어쩔 수 없이 불길한 예감에 젖어 든다. 이번에도 시정의 담론이 보다 ‘언론적’이라는 평가를 얻게 되는 것이나 아닌가. 그 걱정을 ‘기우’로 전락시킬만한 언론의 담론은 끝내 타오르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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