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라지는 것은 여백을 남긴다’. 하지만 방송용 스튜디오 세트가 갖는 여백의 시간은 결코 길지 않다. 한 프로그램의 세트가 세워지고, 뜯어지고, 다시 세워지는 것은 거의 하룻밤을 넘기지 않는다.

그 텅빈 여백을 메워가는 힘이 자신의 에너지 속에서 나오고, 그 에너지가 조금씩 쇠잔해져가는 것을 느낄 때, MBC 미술 1팀 세트디자이너 서영오씨(33)는 가끔 세트가 보이는 객석에서 상념에 젖곤 한다.
세트디자이너는 텔레비전에 드러나는 공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드러나는 상황을 적절히 만들어 내는 작업을 하는 텔레비전 영상의 1차 산파다.

서씨가 교양이나 오락 프로그램의 세트를 담당하는 미술 1팀에 들어온 지도 벌써 9년여가 돼간다. 그가 지금 맡고 있는 프로그램은 <인기가요 베스트 50>(토), <김동건의 텔레비안 나이트>(금), <뉴스센터>다.

토요일 오후 6시에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인기가요베스트50>이 있는 6월 29일 아침, 언제나처럼 돌바기 아들 재완이가 아침 6시부터 배위에 올라가 장난을 친다. 녀석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배인지는 모르지만 어젯밤 늦게까지 세트가 설치되는 것을 지켜보느라 늦게 집에 들어온 그에게는 적잖이 힘
들다.

세트 디자인을 담당하는 서씨는 보통 세트가 설치되는 것까지 지켜보지 않는다. 앞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서 세트를 해체하고 새로운 세트가 설치되는 시각은 새벽 2∼3시가 돼야 되기 때문이덛. 하지만 어제는 왠지 개운치 않은 마음이 들어 늦게까지 스튜디오 설치를 지켜봤다.

설치팀의 이무영팀장이 어제 낮부터 어려운 작업환경을 호소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방송 50회 기념 공연을 의식, 평소보다 크게 세트를 설계한 것이 마음에 걸려 자정쯤까지 세트설치를 지켜보고 집에 들어왔었다.

토요일 아침 서씨가 증산동 집을 나선 것은 8시. 주로 여의도행 좌석버스를 이용한다. 버스안에서 비교적 크게 작업을 진행한 이번 <인기가요 베스트 50>의 세트를 생각해 본다. 10대가 시청자의 중심을 이루고 출연자도 김건모·룰라 등 거의 댄스를 곁들인 팀들이기 때문에 젊은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락카페’ 분위기로 디자인했다.

그러나 평소에 그런 분위기를 느낄 기회가 많지 않아 디자인이 낯설기도 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벌써 회사근처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원혜정씨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다른 일을 하다 얼마전 세트디자이너로 들어와 <뽀뽀뽀>등을 맡고 있는 후배다. <뽀뽀뽀>는 MBC 세트디자이너의 등용문과 같은 프로그램으로 가장 활발하게 크리에이티브를 발휘하고, 그래서 모두에게 애착이 담겨있는 프로그램이다. 그녀를 보고 있자면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의 추억에 젖곤 한다.

시간이 나서 자리에 앉아 지난 주 첫 방송을 시작한 <김동건의 텔레비안 나이트>의 세트를 다시 생각해본다. <주병진의 나이트쇼>가 폐지되며 신설된 이 프로그램에 대해 담당 프로듀서와 세트에 관해 논의하던 중 지나치게 세트부분에 대해 개입을 하려해서 언짢아 하기도 했던 작품이덛.

세트디자이너들이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PD등 다른 스태프가 자신의 영역인 세트디자인에 대해 간섭을
한다고 느낄 때다. 그럴 때면 자신의 창작세계에 대한 간섭으로 느껴져 마찰을 빚기도 한다. 세트디자이너들은 대부분 순수미술을 전공했다.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도 강하지만 순수미술에 대한 갈증도 만만치 않은 것이 보통인데 자신의 창작세계에 대한 간섭을 받을 때 가장 언짢은 기분을 느낀다고 한다.


세트 설치팀과 인간관계 중요

오전 10시경에 자리에서 일어나 <인기가요베스트50>의 세트가 설치된 D스튜디오로 향한다. 설치팀은 밤샘작업을 마치고 퇴근했고 조명과 음향팀이 설치에 열중하고 있다.

세트디자이너가 하는 일은 도면에 세트의 디자인을 그릴 뿐 아니라 그 디자인이 구현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감독하는 일도 한다. 1m도 안되는 도면에 그려졌던 세트 디자인이 거대한 실체로 드러났을 때 가장 큰 성취감을 느낀다. 그 성취감의 이면에는 그 디자인을 완성시켜준 설치팀들에 대한 감사도 포함되어있다. 그래서 세트디자이너들은 설치팀들과 좋은 관계를 갖고 싶어 하고, 어제처럼 그들이 어려움을 호소할 때 결코 방관할 수 만은 없다.

서씨는 무대로 올라가 잘못된 부분이 있는가를 점검한다. 소품은 물론이고 네온 등을 담당하는 전식팀의 작업과정도 확인해야한다. 불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은 네온을 지적하는 사이에 무대주변을 두를 네온박스가 도착한다.

네온은 단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작은데 비해 네온박스는 3색으로 돼있어 활용도를 높일 수 있는 소도구다. 세트에 관한 모든 것을 관장해야하는 세트디자이너들은 소품이나 전식의 활용도를 고려해야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새로운 물품을 구상해 주문하기도 한다.

이것 저것을 점검하고 있는데, 조연출자가 함께 식사나 하자고 재촉해 회사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향한다. 식사 도중 담당PD인 이흥우PD가 술을 권한다. 세트제작비가 많이 들었지만 분위기를 충분히 살릴 수 있어서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이PD와는 그가 조연출시절 야외프로그램인 <우정의 무대>를 함께 제작해 친분이 있다. 사내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과는 달리 모든 스태프가 함께 움직이는 야외 프로그램은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기회다. 서씨는 백령도 촬영일정 때, 술을 먹고 바다로 들어가는 그를 끄집어내준 재미있는 기억도 가지고 있다.

점심이 끝나자 스태프들은 6시 본 방송 전에 1시부터 있는 두번의 리허설을 준비하기 위해 급히 회사로 향한다. 카메라가 없이 진행되는 ‘드라이리허설’이 1시에 있고, 모든 시스템을 본 방송과 같이 진행하는 ‘카메라리허설’이 2시반에 있기 때문이다. 생방송의 경우 방송시간을 고려해야하기 때문에 카메라리허설은 매우 중요하다.

점심을 마친 후 사무실에서 작업을 정리하고 있는데, 드라이리허설이 진행되는 스튜디오의 이PD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PD는 무대중앙에 있는 별모양의 검은색 아크릴이 카메라에 맞지 않는다며, 다른 색으로 바꿀 것을 건의한다. PD들의 취향은 다양한 편이다. 특별히 마음 쓰이는 부분은 아니어서 그는 흔쾌히 동의한다. 세트디자이너는 작업시 카메라의 앵글, 조명, 출연자의 동선 등 모든 환경을 고려해서 디자인을 해야한다.


스태프진과 때론 신경전도

세트에 나온 김에 다른 요소들도 적절하게 배치돼 있는가를 확인하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온다. 예정보다 조금 늦게 카메라리허설이 시작됐다. 이미 무대에 대한 대부분의 준비는 맞추어져 있다. 특별한 실수를 제외하고는 이제 거의 변경되지 않는다. 카메라를 가지고 무대의 장면들을 미리 찍어두고, 사무실로 들어와 캐드시스템을 켠다.

이 시스템은 부조정실과 연결되어 있어 카메라에 잡힌 무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모니터에 비친 몇 장면을 저장해둔다. 카메라리허설은 4시 반 경에 끝났다. 세트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일도 비로소 끝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자신이 만족스러울 경우이고 세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짐을 계속 달고 다녀야한다. 프로그램의 개념파악에 실패해 엉뚱한 세트가 설치됐을 때는 아예 촬영장 근처에도 가기가 싫다.

이제 아들 재완이가 할머니를 보채고 있을 집으로 향한다. 조소를 전공한 아내도 작은 학원을 하면서 창작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재완이는 늘 할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회화를 전공한 서씨는 미술이라는 같은 길을 가는 아내를 통해 입체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어 많은 도움을 받는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 호출기가 있는 오른쪽 허리가 여전히 신경이 쓰이지만 애써 토막잠에 빠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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