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죽음당한 물고기들이 허옇게 배를 드러낸 채 강가에 널부러져 있는 사진을 본다. 절망감과 분노가 치솟는 것을 참기 힘들다. 뿌옇게 흐린 하늘이 도시의 상공을 짓누르듯 뒤덮고 있다. 이런 공기를 마시면서 천천히 우리의 육신이 죽어갈 것이란 공포감이 엄습한다. 환경오염과 생태계의 파괴가 가져올 가공할 만한 결과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수많은 경고가 발해져 왔다.

70년대 초에 작성된 로마클럽의 보고서 <성장의 한계>는 이미 인구자원 식량문제와 더불어 환경문제가 인류의 미래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때만 하더라도 우리들로서는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실감하기 어려웠다. 공장굴뚝에서 내뿜는 검은 연기를 보면서 공기의 오염을 걱정하기보다 국력의 발전에 흐뭇해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것이 이 나라의 실상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4반세기가 지난 오늘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은 생태주의자들의 것만일 수 없게 되었다. 먹고 마시고 숨쉬는 우리의 일상생활 전체가 예측할 수 없는 불안과 불길함에 휩싸여 있으며,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만한 정도의 삶조차 다음 세대의 우리 자식들에게 보장될 수 있을지 아무도 자신하지 못하고 있다.

2백만년이 넘는다는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우리 세대는 우리 몫의 자원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앞세대와 뒷세대들의 몫조차 몽땅 꺼내쓰고, 그리하여 생존의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환경파괴의 심각성이 아무리 관념적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아무런 조치도 사실상 취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차원에서나 국가사회 전체의 차원에서나 그것은 마찬가지다.

가령, 도시인들의 절반 가량이 아파트에서 살고 있고 아파트 아닌 일반 주택도 요즘은 아파트처럼 편리한 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편리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원과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을 수 없다.

물과 전기와 가스의 공급이 무슨 비상사태나 자연재해 때문에 어느날 갑자기 중단된다면 우리의 삶은 엄청난 공황사태에 빠질 것임에 틀림없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아무리 자연친화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더라도 무의식중에 자연파괴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자가용을 운전한 지가 이제 3년이 가까워온다. 나 같은 사람까지 차를 몰아서야 되겠는가 하고 견디는 데까지 견디려고 했으나, 결국 저항을 포기하고 말았다. 자동차에 대한 가족들의 압력이 그만큼 거세었던 것인데, 내가 항복하면서 자신에게 변명한 이유의 하나는 나의 다른 모든 생활이 현대 소비사회의 편익구조에 기반해 있으면서 차만 몰지 않으면 면책되겠는가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하나뿐인 이 지구를 후손들이 안심하고 살만한 터전으로 남겨 놓으려면 우리 생활방식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 눈만 뜨면 텔레비전부터 켜서 전기를 소비하고, 어떻게든 더 안락한 조건에서 더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고 하는 방식의 삶을 그만두지 않는 한 인류의 장래는 암담한 것일 수 밖에 없다. ]

국제화·세계화·경쟁력 강화 따위의 구호에 의해 인도되는 이 사회의 방향은 바로 인류공멸을 향한 죽음의 질주이다.
(영남대 독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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