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전쟁의 마무리가 아리송하다. 지난달 25일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전격적으로 조선일보 방일영 고문과 회동을 가진 이후 40여일간 끌어온 신문전쟁이 사실상 종결국면에 들어가고 있지만 회동 경위와 대화 내용을 둘러싸고 당사자들이 서로 상반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조선은 삼성측이 지난 16, 19일 두차례에 걸쳐 방고문과의 회동을 요청했다는 주장이다. 삼성그룹의 공식적인 루트는 아니었지만 이 회장의 측근이 이같은 의사를 전달해 왔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삼성측은 이번 회동은 선경그룹 최종현 회장의 주선에 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선경그룹. 선경측은 이같은 삼성의 주장에 대해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했다. 선경은 27일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회동 경위를 애매모호하게 언급했다. 선경은 이 자료에서 “최 회장이 자발적으로 대화를 주선했다”고만 밝히고 있다. 선경은 27일 조선의 항의를 받은 직후 기자들에게 “대화를 중재한 것일뿐 만남을 중재한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이로 인해 일각에선 ‘정치권 중재설’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볼때 조선이나 삼성 중에 한쪽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최소한 고의적으로 사실을 은폐하고 있는 셈이다. 현재 상태에서 정확한 회동 경위 파악은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당사자들 간의 말이 엇갈리고 있는 상황에서 진실을 가려내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경위 공방에도 불구하고 조선과 삼성의 회동 배경은 일단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으로 분석하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이는 사실상 방고문과 이회장의 회동이 이처럼 갑자기 이루어질 것으로 보는 관측은 그리 많지 않았다는데서 출발한다.

회동 전까지만 해도 조선일보와 삼성그룹 사이엔 명예훼손 소송 및 언론중재위 정정보도, 반론권 청구가 진행 중이었고 삼성의 조선일보에 대한 광고중단 조치도 변화의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양측이 팽팽하게 샅바를 움켜잡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삼성과 중앙일보는 회동 직전까지 신문전쟁 국면에서 결코 불리한 입장이 아니었다. 조선일보 역시 삼성과 중앙의 법적 대응에 맞서 삼성항공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고 간헐적으로 삼성 비판 기사를 돋보이게 처리하는 등 ‘전의’를 감추지 않았었다. 이런 상태에서 양측이 화해로 돌아선 것은 무엇보다 신문전쟁이 장기화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공감대가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일각의 언론 및 재벌 개혁설을 의식하고 신문전쟁에 대한 비난여론이 비등해지자 자사 이미지 관리와 경영 등을 고려한 결단이라는 해석이다.

이런 가운데 삼성 이회장의 경우 회동에 앞서 중앙일보와는 사전 조율을 거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아 주목된다. 이는 이번 회동에 대한 중앙일보의 움직임에서 명확히 감지된다. 중앙일보는 방고문과 이회장의 회동이 알려진 직후 다소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다. 회동 사실이나 대화내용 등에 대한 기자들의 확인 요청에 “모르겠다. 알아보겠다”는 답변이 전부였다. 게다가 홍사장마저 26일 오후 4시경 갑자기 방상훈 사장을 방문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전 조율이 없었다는 의혹을 뒷받침했다.

이회장은 회동이 끝난 뒤에서야 홍사장을 자택으로 불러 회동 결과를 알리고 다음 날 곧바로 조선일보 방사장을 방문할 것을 지시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홍사장은 26일 방사장 방문 형식을 조선일보측과 상의하며 자신의 방문사실을 보도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홍사장의 태도는 이회장이 회동 이후 삼성의 간부를 조선일보, 선경측과 만나게 해 발표문을 상의토록한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홍사장은 또 이날 방사장을 방문하면서 정문이 아닌 주차장 후문을 이용해 방문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삼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중앙일보가 25, 26일의 회동 사실을 접하고 보인 반응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26일 금창태 전무가 참석한 중앙일보 편집회의 자리에선 간부들의 침통한 심정이 여과없이 토로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간부들이 “이번 사태에 대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고흥길 편집국장이 “내가 책임지겠다”고 발언한 것으로 확인됐다. 일부 간부들은 이 과정에서 사의를 표명하기도 했다고 한 관계자는 전했다.

언론계 일각에선 이같은 삼성 이회장과 중앙의 공조체제가 제대로 가동되지 않은 것이 회동 하루 뒤인 26일의 전노재판과 무관치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회장이 26일 선고공판을 앞두고 조선일보와의 불편한 관계를 상당히 부담스러워 했으리란 관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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