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3년 3월 영국의 역사학자 파킨슨이 사망했다. 그는 60여권의 저서를 남겼지만, 그의 이름을 빛나게 만든 건 다름아닌 ‘파킨슨의 법칙’이다. 이 법칙 만큼 관료 조직의 무한팽창 경향을 단순 명료하게 지적한 게 또 있을까?

관료 조직은 괴물이다. 조직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생명체와도 같다. 일이 있건, 없건, 많건, 적건, 어렵건, 쉽건 조직은 팽창한다. 그렇게 해서 팽창된 조직은 새로운 일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일은 또 조직을 팽창시킨다. 그와 같은 끝없는 확대재생산의 과정을 거쳐 조직은 공룡처럼 비대해진다. 다소 과장되게 표현하긴 했지만, 이게 ‘파킨슨의 법칙’이다.

언론의 ‘닮은꼴’ 경쟁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 우리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다. 안전의 욕구와 출세의 욕구 때문이다. 어느 조직이든 부하가 많고 예산이 많아야 그 조직의 우두머리가 힘을 쓴다. 그러니 조직을 크게 만들기 위해 무엇을 망서리랴.

사람이 너무 많아 할 일이 없다고 빈둥빈둥 놀면 그 조직은 축소될 위험이 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일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건 공무원 집단의 경우 민간 영역에 대한 불필요한 간섭과 규제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우리 언론사 조직으로 눈을 돌려보자. 그것도 기본적으로 관료 조직이다. 그런데 언론사의 경우엔 간섭과 규제가 주요 기능이 아니며 언론사들끼리 치열한 경쟁을 하기때문에 조직 구성원들의 안전의 욕구와 출세의 욕구는 전혀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그게 무언가? 그게 바로 ‘똑같아지기 경쟁’이다.

왜 우리 신문들은 획일적일까? 왜 큰 차별성이 존재하지 않는 걸까? 왜 2류 신문들(발행부수 기준)은 1류 신문과의 차별화를 과감하게 시도하지 않는 것일까?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밑질 게 전혀 없는 데도 말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조직 구성원들의 ‘안전 제일주의’때문이다. 남들 하는대로 무난하게 따라가면 신문이 잘 나가지 않더라도 크게 책임질 일이 없다.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자리는 보장된다. 사주의 비위만 잘 맞추면 출세까지 할 수 있다.

반면 괜히 뭔가 잘 해보겠다고 파격적인 변화를 시도하면 신문이 잘 나가지 않는 책임을 그런 시도를 한 사람이 덮어 쓰게 된다. ‘튀는’건 요즘 신세대의 미덕이지 자녀들 학비가 한창 나갈 나이에 있는 언론사 간부가 취할 태도는 아니다.

무난한 게 좋다는 정서는 조직원들 대부분에게 공유돼 있다. 만약 소조직이라면 모두 모여 술 한잔 하면서 연대 책임으로 모험을 해보자고 의기 투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문사는 그런 식으로 의기 투합할 수 있는 소조직이 아니다.

사주 역시 우리 사회에서 언론사 사주가 누릴 수 있는 ‘터무니없는’ 특권에 관심이 있지 어떻게 해서든 신문 한번 잘 만들어보겠다는 욕심은 없다. 무언가 해보겠다고 자꾸 일 저지르려는 사람보다는 그저 말 잘 듣는 사람을 거느리고 싶어한다.

신문을 여남은 개를 보는 나는 매일 깊은 회의에 빠진다. 판에 박은 듯이 다 비슷한 이 신문들을 다 볼 필요가 무엇일까? 어느 신문은 외신면을 과감하게 서너 페이지로 늘려 다른 신문들이 소홀히 하는 나라들에 관한 뉴스를 집중적으로 다루면 안되는 걸까? 또 어느 신문은 그래픽과 통계를 최대한 활용하는 독특한 보도 방식을 취하면 안되는 걸까?

2류 신문들은 1류 신문들과 맞대결하겠다는 것일까? 일부러 차별성을 두지 않음으로써 1류 신문들의 독자를 빼앗겠다는 것일까? 그게 가능할까? 이른바 ‘틈새 시장’은 없는 것일까? 신문 1개를 구독하는 독자에게 2개를 구독하게끔 완전히 차별화된 신문을 만드는 건 어리석은 짓일까?

관료질서에 물든 신문

모를 일이다. 프로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데 나와 같은 아마츄어가 무얼 알겠는가? 하지만 ‘파킨슨의 법칙’이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한가지 교훈은 있다. 창의성과 모험정신을 압살하고 안전과 그것에 근거한 출세에만 집착하게 만드는 관료 조직이 우리 언론사를 지배하는 한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비슷한 신문들을 보게 될 것이고 차별성은 오로지 보급소 차원의 경쟁에서만 나타날 뿐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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