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한총련 보도에 이어 전·노재판 1심판결을 통해 다시한번 ‘역사인식 부재’와 ‘정·언유착’의 생태적 한계를 드러냈다.

한총련사태 당시 경찰의 자의적 과격성 판단이나 시위목적 등에 대한 보도를 ‘자제’하고 폭력성 부각에만 주력했던 언론은 12·12 및 5·18사건 1심판결에서는 ‘역사바로세우기’를 연상시키는 ‘준엄한 역사재판’ ‘한국민주주의 실력 과시’ 등 화려한 타이틀과 함께 미결된 역사단죄의 의미부여에만 급급했다. 학생시위의 폭력성을 질타하면서 ‘고리타분한 통일담론’은 외면하고 ‘새시대의 성숙한 사회인식’만을 강조하던 언론이 외화내빈의 부실한 보도자세로 ‘역사청산’이란 복고적 주제에 광분, 일
관된 시각 없이 이율배반적인 해바라기보도의 관행을 답습했다는 것이다.

민실위는 12·12와 5·18, 비자금으로 이어지는 신군부세력의 역사적 범죄를 철저히 규명, 역사발전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인식아래 5·18 진상규명에 실패한 검찰의 수사부실과 일부 피고인의 내란목적 살인혐의 무죄판정에 대한 언론의 무관심에 주목한다. 더불어 정·경유착의 실체를 폭로한 비자금재판에 대한 경제안정논리 일색의 해설보도에도 의혹의 눈길을 거둘 수 없다. 결심판결이 첩첩산중의 험로를 남기고 있는데도 벌써부터 일부지역의 여론이란 명분으로 ‘사면’관련 추측보도를 내보내는 숨은 의도는 더욱 우려를 금할 수 없게 한다.

현대사 최대의 상처인 5·18 시민학살의 진상을 명확히 규명하지 못한 채 신군부세력의 반역사적 군사반란의 단죄는 완결성을 가질 수 없다. 원인치유가 아닌 대증치료만으로는 ‘역사바로세우기’가 불가능할 뿐더러, 정부와 언론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던 ‘역사청산을 통한 국민총화’도 구두선으로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이번 판결을 바라보는 도하 각 신문과 방송의 유일한 명제였던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될 수 있다’는 현상적 해석 자체가 역사인식이 배제된 단선적 사고일 수 있다. 국민의 인권을 압살한 위헌적 모반이 성패에 따라 사활의 운명을 결정할 개연성을 소지한다는 논리구조 자체가 역사와 민족과 시민사회에 대한 쿠데타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 현실이고 실정법의 외양을 쓴다고 해도, 세계관의 다양성을 근거로 다원사회의 특수가치를 표방한다 해도, 사회유지의 기층가치인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한 어떠한 ‘구국적 결단’과 범죄도 용납돼선 안될 것이다.

이같은 논지에도 불구하고 동아일보의 깔끔한 쟁점분석, 영향력을 과시할만한 조선일보의 신속한 문맥파악, 석간신문 일부의 발빠른 기동취재 등 독자들의 관심을 의식한 각 언론의 노력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호용·황영시피고의 내란목적살인혐의 무죄판결 등 진정한 역사재판의 핵심인 5·18 진상규명 부실에 대한 본격적인 심층보도가 없었다는 점에서 언론 전반의 역사의식 결여 및 편향적 보도자세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각 언론은, ‘전두환 사형선고’의 의미확대에 밀려 그 사회적 비중에 비해 지면할애가 적었던 비자금판결 보도에서도 상업언론의 재계의존적 보도관행을 되풀이했다. 동아일보 8월27일자 사설은 이번 재판의 문제점으로 최규하전대통령 증언 무산을 꼽는 것과 함께 ‘대기업 총수들이 실형과 집행유예등 무거운 선고를 받은 것은 기업활동의 위축을 가져올 우려가 크다’며 ‘기업에 전념할 수 있게 배려’를 당부해 논점을 흐렸다.

조선일보도 8월28일자 사설을 통해 ‘재벌총수에 대한 중형선고는 비자금, 정치자금을 단절하고 정상경영과 민주경영으로 접어드는 계기가 되어야 의미가 있다’고 못박고서도 같은날자 ‘비자금 재벌총수 실형선고 의미’란 해설기사를 통해서는 리드부터 8월26일의 주가폭락을 언급하며 이번 선고로 인한 재벌총수들의 기업활동 제한사례를 나열하고 기업활동 위축을 우려한다는 논지의 재판장 발언을 인용하는 등 판결의 의미와 양형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분리하려는 저의를 숨기지 않았다.

1심판결 당일 TV의 지역별 여론동정 방송을 시작으로 여론의 지역편재 현상과 연계해 정치권 등의 ‘사면’관련 발언 등을 보도한 것도 선정주의적인 보도행태로 분석된다. 항소가 분명한 상황에서 사면을 언급하는 것은 과거의 헌정사를 감안하더라도 신중하지 못한 자세며 악의적인 용도로 활용될 소지마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언론은 ‘똑같은 논조에 똑같은 편집’이란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다양하면서도 수미일관된 편집정책과 그 전제로서의 상식. 역설적이게도 일선기자들의 기사와 사설의 시각차를 통해 일말의 가능성을 엿보게 되니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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