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마저 파괴하면서 혓끝으로는 ‘법대로’의 주문을 외워대던 무리가 또 한번의 반란을 획책한다. 저 반란과 내란과 학살의 피고인들을 보라. 그 변호인들을 보라. 저들은 이제 사법부의 ‘신속한 재판’에 반기를 휘날린다.

한마디로 저들의 트집은, 한 주일안에 두번의 재판이다. ‘따라가기 어려운 변론준비’를 핑계삼아 변호인들은 시위하고, 명색이 대통령을 지냈다는 두 피고인은 법정출석을 거부한다. 그토록 열창하던 저들의 ‘법대로’는 사뭇 풍화되어버린 모양이다.

내키지 않지만 묻고자 한다. 그대들 두사람이 ‘통치’하던 시대의 ‘법대로’는 과연 어떠했던가. 학살과 고문에 이르는 불법 무법의 난도질은 접어두기로 하자. 그나마 형식을 갖추었다는 재판의 경우만이라도 돌아보아주기 바란다. 한주일에 두번은 고사하고, 날이면 날마다의 재판은 없었던가. 심지어 깊은 밤중까지의 재판은 없었던가.

물론 그렇다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따위의 원초적 응보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그대들의 ‘통치’가 그러했다고 할지라도, 이제는 명실(名實)이 일치하는 ‘법대로’의 절차로 그대들을 다스리고자 하는 것이 겨레의 뜻이며 역사의 뜻이다. 그대들의 ‘법대로’ 그대들을 다스린다면 진정한 법의 지배는 살아나지 못한다. 군의 법통과 광주의 양심도 바로 서지 못한다.

때문에 그대들에 대한 사법적 심판은 더없이 엄정해야 마땅하다. 무겁기 짝이 없는 그 전제는 누구도 흔들 수 없다. 나는 오로지 그대들이 듣지 않더라도, 그리고 그대들의 양심을 울릴 수 없다고 할지라도 말하고자 한다. 재판의 신속이 반드시 재판의 공정을 해치는 것인가.

어떤 나라의 속담은 “정의의 지연은 정의의 부정”이라고도 말한다. 따라서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재판의 지연은 정의의 부정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부연된다.

멀리서 보기를 끌어들일 나위도 없다. 아무리 고깝더라도 귀를 기울여주기 바란다. 바로 그대들에 대한 사법적 심판의 지연으로, 이땅의 정의는 얼마나 오랫동안 부정되어 왔던가. 무려 17년, 또는 16년의 세월이 정의를 회복하지 못한채 지나가 버리지 않았던가.

때문에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재판의 공정을 참으로 살리기 위한 재판의 신속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한달에 한번 또는 한주일에 한번쯤으로 이어지던 지난 날의 재판을 ‘월부(月賦)재판’ 또는 ‘주불(週拂)재판’ 따위로 비아냥 거리기도 한다.

더구나 우리의 헌법도 여느 나라의 경우처럼 ‘신속한 재판’을 권리로 선언한다. 그렇다면 반사적으로 ‘신속한 재판’은 사법부의 책무이기도 하다. 물론 ‘신속한 재판’의 권리가 피고인의 이익에 일치하지 않는다면 버려질 수도 있다는 풀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풀이에 따르더라도, 재판의 지연이 몰아올 사법의 기능저하는 여전히 경계된다. 모든 재판이 모두 지연된다면, 공정의 한 함수인 적시성(適時性)은 훼손되고 사법의 권위와 기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어느 모로나 반란과 내란과 학살의 피고인들, 그리고 그 변호인들의 작태는 도저히 정당화될 수 없는 또 한번의 반란이다. 반란의 법정에 선 그대들이여, 오늘은 이미 그대들의 반란이 ‘성공’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왜 그대들은 오늘 법정에 섰는가. 쇠고랑을 차야 했는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깨달으라.

스스로 어리석은 반란의 몸짓을 거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대들의 사선 변호인들이 변론을 거부한다면, 기꺼이 국선 변호인의 도움을 받아들여야한다. 변호인을 사선할만한 힘도 없는 겨레들은, 오늘에도 국선 변호인의 도움에 그들의 명운을 의탁한다. 그대들이 무엇이길래, 사선이 아니면 안된다는 특권의 고집을 버릴수 없는가.

그리고 사법과 동일하게 신속과 공정의 틈바구니에서 고뇌하는 이땅의 언론이여. 이제는 더 이상 ‘파행’이니 ‘반쪽재판’이니 하는 따위의 헛소리를 되뇌이지 말아주기 바란다. 국선도 당당한 변호인이다. 국선 변호인의 변론을 ‘파행’이나 ‘반쪽‘으로 폄하하는 헛소리는 사법제도와 국선 변호인에 대한 모독이며, 그 혜택에 의탁하는 겨레들에 대한 가혹한 멸시의 표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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