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취재나 체육부기자를 해본 것도 아닌 주제에 고작 TV로나 본 문화부기자가 뭘 알까마는 감히 몇 자 적는다.

“죽어라고 착지연습만 했는데….” 남자체조 종목별 결승 뜀틀부문에서 고난도의 신기술을 선보이고도 착지에서 통한의 실수를 해 다 잡은 금메달을 놓치고 만 여홍철이 울먹이며 한 말이다.
언론과 사회의 관심이 온통 ‘금’에만 쏠린데다 한국팀의 매달부진으로 그의 부담은 훨씬 컸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쿠에르보 더블 턴’이라는 신기술을 개발, 경기내용면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라이벌인 러시아의 네모프가 9.787을 기록한 뒤 여홍철이 등장했다. 1차시기에서 월등한 점수(9.837)로 네모프를 제친뒤 2차시기를 위해 도약앞에 선 그에게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힘겨웠던 연습과정이나 고향 광주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며 고생하는 부모님이었을까. ‘금’이 가져다 줄 스포트라이트나 월50만원씩 평생지급된다는 연금이었을까. 아니면 체조인으로서의 자존심과 영광이었을까.

그런 것들은 한낱 관전자나 호사가들의 한가한 추측일 뿐이라는 듯 그는 무념무상인채 달려나갔고 1차시기때보다 더 힘차게 공중으로 비상했다. 몇분의 일초에 불과할 찰나였겠지만, 솟구쳐오른 그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바닥에 내려서는데…. 그만 세발짝이나 뒷걸음질쳤다. 1, 2차 합계 최종점수는 9.756. 네모프에 불과 0.031차로 뒤졌다. 나는 그 극미에 가까운 숫자가 갖는 ‘체조적 의미’는 잘 모른다.
그러나 그 징그럽게 적은 숫자가 그에게 안긴 허탈의 크기는 헤아릴 수 있다.

세발짝의 뒷걸음질에 저간의 모든 고생과 염원도 함께 뒷걸음질쳐 버렸다. 해설자의 얘기로는 한발짝만 덜 물러났어도 우승은 간발의 차이로 여홍철의 것이었다고 한다. 한발짝당 0.1점 감점이 채점규정이라고 했다(하도 아쉬워서 해설자가 알려준대로 떠듬떠듬 더하기 빼기 나누기 해봤더니 한발짝만 덜 물러섰다면 여홍철이 0.019 차이로 1위를 차지했다).

그는 주저앉았고 로진이 잔뜩 묻은 손등으로 붉어진 눈시울을 훔쳐냈다. 취재진이 몰려들었고, 웅크린채 울먹이는 그의 등과 머리위로 카메라플래쉬가 작렬했다. 잔인하게도. 그래서 더 좋은 ‘사진거리’였지만.

우리의 아쉬움이 어찌 그의 서운함에 비교나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억울하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음 순간, 제발 이제는 쇼비니즘적 애국심이 과잉발휘되는 그런 말은 정말이지 제발 없어졌기를 바랬는데,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그의 등뒤로 벌써부터 4년뒤 시드니올림픽을 ‘당부’하는 아나운서의 ‘채찍’이 여지없이 얹혀졌다.

정작 그 순간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욕봤다’는 위로와 두어번 등을 두드려주는 격려가 아니었을까. 그가 구사한 ‘쿠에르보…’라는 기술은 ‘여홍철’이라는 이름과 함께 국제체조연맹기술집에 영원히 수록된다고 한다. 그것은 그에게뿐만 아니라 ‘코리아’에게도 금메달보다 훨씬 값진 영광이 아닌가.
이제는 만시지탄이지만, ‘스포츠머신’이나 ‘메달제조기’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체육인’을 길러낼 때가 되지않았을까. 소득 1만불시대와 ‘삶의 질’을 소리높여 외치기 시작한 게 벌써 언제인데, 왜 아직까지도 운동시합만 벌어지면 온 국민을 신문 방송 앞에 붙들어 앉혀놓고 금메달 수와 격앙된 애국심타령인지 자조를 넘어 서글퍼진다.

눈물을 감추고 시상대에 선 여홍철이라는 청년이 그날따라 더 잘 생겨 보였다. 아름다웠다.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너나없이 인터뷰나 박스기사마다 4년뒤 시드니 올림픽의 ‘금’을 확신하며 다시 ‘메달 쟁취전선’으로 내몰았던 우리가 정말 부끄러웠다. 그런데 우리의 이런 부끄러움이 이번 올림픽에서 어찌 여홍철 하나에게만 해당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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