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일당에 대한 논고와 구형소식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불현듯 그 위에 겹쳐지는 지난 해의 늦가을 풍경이 떠오른다. 아직도 5·18특별법이 손에 잡히지 않았던 그 무렵, 서울의 종묘공원과 종로거리는 주말마다 5·18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시민들의 외침으로 달아 올랐다.

한마당의 집회가 끝나고 나면 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민들은 가두행진에 나섰다. 억수처럼 쏟아지는 최루탄 세례에도 아랑곳 없이 시민들은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메아리도 좀처럼 울려오지 않았다.

방송의 한마디, 신문의 1단에서도 시민들의 절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뿐이었다면 오히려 ‘다행’이었을지 모른다. 어떤 신문은 시민들의 행진으로 말미암아 서울의 교통이 마비되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심지어 고속도로의 혼잡마저 그 기사의 끝머리에 갖다 붙이는 것이었다.

그렇던 언론이 이제 서릿발 같은 검찰의 논고를 찬양한다. ‘현대사를 얼룩지게 한 미증유의 대사건’임을 되뇌인다. 오늘도 언론의 말석을 더럽히고 있다고 자부하고자 하는 나는, 한마디로 두렵다. 아, 나에 대한 논고와 구형, 이 땅의 언론에 대한 심판은 언제 어떻게 내려질 것인가.

물론 인간의 언행이란 한결같을 수만은 없다. ‘회개’와 ‘깨달음’이라는 낱말이 생생히 살아있다는 것은 그 유력한 반증이다. 그렇다. 이 땅의 언론이 진정 ‘회개’와 ‘깨달음’으로 오늘과 같은 표변에 이르렀다면 두 손을 들고 반길 일이다. 전혀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작금에도 이어지는 재벌언론과 언론재벌의 흙탕물 싸움을 지켜보노라면, 아직도 ‘깨달음’과 ‘회개’의 낱말을 안겨주기에는 멀다. 무릇 ‘회개’와 ‘깨달음’이란, 양심이 깨어나는 새벽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언론 또는 언론 종사자의 양심은 단순히 개인의 인격권과 관련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언론다운 언론을 위한 법리와 사회의 요구이기도 하다. 민주국가의 헌법이 보장하는 ‘알권리’란 거짓을 알 권리일수 없다. 진실을 진실 그대로 알 권리이다. 그렇다면 겨레의 ‘알권리’를 충족시켜야 할 언론종사자는 끝없이 진실을 추구해야 할 책무를 저버릴 수 없는 것이다.

진실은 양심의 등불 앞에서만 알몸을 드러낸다. 때문에 언론 또는 언론종사자의 양심은, 개인의 덕목을 넘어 나라의 법률과 사회가 요구하는 의무 조항이기도 하다. 바꾸어 말하면 사회성을 갖는 양심이라는 뜻이다.

그 선명한 보기의 하나가 프랑스의 이른바 1935년 노동법이다. ‘양심조항’을 담고 있는 그 노동법의 제29조는 이렇게 규정한다. “신문 또는 기타 정기간행물의 성격이나 경향에 현저한 변화가 드러나고, 그에 따라 기자의 명예와 평판 또는 그 도덕성을 해치게 될 때는, 기자는 특별히 충분한 보상금을 받고 퇴사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그 ‘양심 조항’을 언론종사자에 대한 법률적 특별보호조항이라고 풀이하지만, 그것은 일면의 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그 ‘양심 조항’이야말로 언론에 대한 사회적 요구의 법률적 확인이라고 생각한다.

전두환 일당에 대한 논고와 더불어 지나간 날의 종로거리를 떠올리고, ‘회개’와 ‘깨달음’을 되뇌이며, 마침내는 공자 타령같은 ‘양심’을 들먹이는 것은 다른 뜻에서가 아니다.

오늘 이 땅의 미디어들이 드러내는 ‘흙탕물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그 언론종사자들의 양심 또한 흙탕물로 비추어진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이들이 많으리라는걸 나는 알고 있지만, 세상의 눈은 반드시 그렇게만은 보지 않는다.

양심의 위기는 언론의 위기이다. 그것은 ‘알 권리’의 위기이며, 말길로 지탱되는 민주주의의 위기이기도 하다. 그 위기를 위기로 통감하지 못하고, 위기의 승부에만 매달려 있는 한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다. 모두가 패자일 따름이다. 때문에 우리의 화두는 이제 한마디로 압축되어야 한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숙연한 그 물음에 올바로 응답하기 위한 고뇌와 행동이 필요한 때이다. 이제 어떻게 할것인가?
허락된다면 나 같은 짧은 소견의 무리도 그 응답의 마련과 실천에 기꺼이 참여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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