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언론 때문에 약을 먹고 자살하려 했다. 가정을 파괴시키려고 작정을 했느냐. 살 날이 많은 얘를 자꾸 기죽이고. 나는 타격을 입어 영업도 못하고 있다. 휘발유를 갖고 언론사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지난 5일과 6일 언론엔 “성폭행 당한 여중생이 학교에서 출산해 충격을 주고 있다”는 보도가 대서특필 됐다. 이 여중생의 아버지는 14일 본지와의 전화통화에서 자신의 무너지는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이 사건이 언론에 알려지게 된 것은 국민일보가 5일자 사회면 머릿기사로 처음 보도하면서부터다. 이 기사를 쓴 김모기자는 회사의 한 선배로부터 지난 1일 제보를 듣고 소방서와 병원 등을 통해 서울 A여중에서 지난달 27일 이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후 여중생이 다닌 학교를 방문, 취재를 통해 사건의 내용을 확인했다.

국민일보 보도가 나가자 5일 신문사, 방송사의 기자들은 A여중에 무더기로 몰려왔다. 이 과정에서 A여중 교사들은 “기자 XX”라는 격한 표현까지 써가며 기자들을 내쫓았다. A여중의 박모교감은 “이런 식으로 자꾸 써대면 교육이 설 자리가 없다”고 항변했다. 당시 취재에 참여했던 한 기자는 “물먹은 기사라 데스크에게 항변도 못했지만 과연 이런 걸 보도해야 하는지 괴로운 심정이었다”며 “쓰라고 하니까 썼다”고 말했다.

6일자 전일간지와 방송은 스트레이트 기사 외에 해설, 기획, 사설 등을 통해 다투어 이 사실을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특히 ‘여중생 수업중 출산’이란 스트레이트 기사 옆에 “10대 위기의 성 집중조명-임신…낙태… 별것 아니예요” 제하에 “10대의 성이 문란해지고 있다”는 기사를 게재, 마치 이 여중생이 문란한 생활로 인해 임신을 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이튿날인 8일자 중앙일보는 ‘한마을의 어른 14명이 11살 먹은 소녀 가장을 번갈아 폭행’한 사건을 다루며 “평소 이양의 품행이 단정치 못한 줄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는 주민 맹모씨의 말을 그대로 인용, 초등학교 6학년 이양이 성폭력을 유발시킨 것처럼 오인하도록 만들었다.

미성년자 성폭행과 관련한 보도는 그후 며칠간 계속 사회면을 장식했다. 일부 신문의 경우 데스크가 미성년자 성폭행과 관련한 기사를 집중 취재할 것을 일선기자에게 지시하기도 했다. 무분별한 언론보도가 계속되자 한국성폭력상담소(소장 최영애)는 8일 전 언론사에 ‘여중생, 초등학생 성폭력 사건 보도태도에 대한 항의서’를 보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이 항의서에서 “피해자가 10개월간이나 숨기면서 임신사실을 혼자서 감당할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이 10대의 문란한 성문제로 호도되고 초등학교 6학년인 여학생에게조차 ‘여성이 성폭력을 유발시킨다’는 그릇된 통념을 여과없이 표출한 데 대해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며 언론의 윤리의식 실종을 어이없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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