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노조 탄생의 정서는 ‘부끄러움’이다. 불의한 권력의 동반자였다는 죄의식이 언론노조를 만든 토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89년 11월26일 언론노동자의 전국조직으로 결성된 언론노련이 창립하면서 발표한 ‘국민에게 드리는 글’에서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한 시대의 거대한 악에 편승해 있었고, 겁에 질려 있었으며 우리들 자신이 시대의 피해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시대의 가해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그러한 비겁함은 끝내 시대와 역사의 민주적 진진을 가로 막는데 일조를 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뉘우칩니다.”

언론노조는 오욕의 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무기였다. KBS 시청료 거부운동과 취재현장의 돌팔매질로 표현되는 국민들의 언론에 대한 불신을 딛고 일어서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무기로 언론노조를 선택했다. 권력과 언론자본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것이 올바른 선택이었음은 언론사노조 최초의 파업이었던 부산일보의 파업에서 증명된다.

사장이 ‘숙명적 여당지론’을 말할 정도로 관영매체였던 부산일보는 88년 7월 6일간의 파업을 통해 ‘편집국장 추천제’라는 편집권 독립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다. 그러나 이 제도적 장치보다 더욱 큰 성과는 과거와의 완전한 결별이었다.

파업과정에서 보여준 부산 시민들의 성원을 바탕으로 부산일보노조는 관영매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비판성 회복을 핵심으로 한 논조 변화에 성공한다. 그 이후 부산일보의 사세확장은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노조의 공정보도 노력이 무너져가는 회사를 살릴 수 있음을 현실로 입증한 것이다.

언론노조는 초기 공정보도 운동에 역량을 집중, 몇개의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기도 했다. ‘어머니의 노래’ ‘광주는 말한다’ 등 성역으로 존재했던 광주를 비로소 프로그램에 담아내기도 했고 5공비리 관련 특집이 나오기도 했다. 편집국장 직선제, 임명동의제, 추천제와 노사가 함께하는 공정보도협의회의 설치등 편집권 독립을 위한 제도적인 장치를 만들기도 했다. KBS, MBC, 연합통신, 서울신문등 친여매체로 분류돼왔던 언론사는 장기간의 파업을 통해 과거를 청산하려는 몸짓을 보였다.

그러나 6월항쟁으로 분출된 국민들의 민주화 열기에 잠시 몸을 움추렸던 정치권력과 언론 내부의 수구세력이 고 문익환목사의 방북 등을 이용, 이른바 공안정국을 조성해 반격에 나서면서 언론노조의 기세는 한풀 꺾이기 시작한다. 90년 4월 관선사장 임명을 반대하는 KBS 사원들의 제작거부를 중단시키기 위해 경찰 병력을 투입한 것은 “더 이상 밀릴 수 없다”는 정부와 언론사 수구세력의 인식을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다.

90년부터 격화된 언론사간의 경쟁도 언론노조의 활동을 제약했다. 신문은 월요판 발행, 조석간, 증면 등의 무한경쟁에 들어갔다. 방송은 상업방송 SBS의 출범으로 시청률 경쟁의 회오리에 휘말렸다. 그 결과 언론자본의 영향력은 점점 비대해졌고 상대적으로 노조의 목소리는 작아졌다. 언론민주화라는 대의보다 회사의 이익을 우선하는 ‘자사이기주의’가 갈길바쁜 언론노조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그래서 지금 언론노조는 고민한다. 점점 증대되어가는 자본의 영향력과 개인주의적 성향을 보이고 있는 조합원들 사이에서 새로운 대안을 찾기위한 모색이다. 그 고민의 와중에서 얼마전 MBC는 불공정 방송의 주역으로 지목된 강성구사장을 퇴진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이는 언론노조의 잠재력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잠재력을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현재 언론노조가 당면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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