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의 6월 항쟁 직후 사회적으로 민주화 요구가 확산되고 노동운동이 폭발적으로 진행되면서, 언론인들의 자성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런 움직임은 언론노조 결성이라는 구체적 활동으로 발전하게 됐다. 1987년 10월 한국일보 노조가 결성된 것을 시작으로 1987년에만 동아일보, 중앙일보, MBC, 코리아 헤럴드 등에서 노조가 결성됐고, 1988년 들어서서는 30 여개의 언론사에 노조가 결성됐다.

각 언론사들의 노조활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권력과 언론자본의 탄압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한 연대기구 결성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1988년 4월 전국언론사 노동조합협의회가 결성됐다.
자유언론과 언론노동자의 권익쟁취를 목적으로 내세운 협의회의 결성은 개별 언론사 단위의 노조활동이 지녔던 한계를 넘어서서 언론노동운동이 본격적으로 언론민주화라는 목적의 실천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됐다. 같은 해 11월에는 노조협의회를 발전적으로 해체, 전국언론사 노동조합연맹이 결성됐다.

언론사 노조들은 연맹 결성 이후 편집·편성권 독립과 공정보도를 위한 제도적 장치의 마련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권력과 언론자본의 강압적 개입으로 언론자유가 크게 침해당해 왔던 현실속에서 편집·편성권 독립은 매우 절실한 것이었다.

편집권 독립에 대한 논란 끝에 단체협상을 통해 대부분의 언론사에서 편집권의 독립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이는 결국 편집책임자에 대한 임명에 노조가 참여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게 됐다. 또한 공정보도를 위한 제도적 장치의 마련이 시급하다는 인식속에서, 각사 노조는 공정보도위원회의 설치를 추진했다. 그 결과 명칭은 다소 다르지만 대부분의 언론사에 노조 직속기구나 노사 공동 참여 기구로서 공정보도 위원회가 설치됐다.

또한 언론사 노조들은 언론인들의 직업적 권익 쟁취를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특히, 기자들을 중심으로 출발했던 언론사노조들은 구체적으로 모든 노조원들이 노조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의사를 결집하여 단결된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직업적 권익 쟁취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 즉, 각 언론사 노조들은 노동자로서의 권익쟁취와 언론인으로서의 공정보도실현, 나아가 언론민주화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인식속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이렇듯 공정보도 실현과 직업적 권익 쟁취를 위한 언론사 노조의 활동은 1988년과 1989년에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어, 1988년에만 16번의 노동쟁의 발생신고가 있었고 8번의 파업결의나 실제 파업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런 투쟁의 결과로서 획득했던 가시적 성과가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언론노조운동은 많은 한계를 안고 있었다.

특히 1980년대 말의 언론노조운동은 언론인들 스스로의 철저한 반성과 이에 따른 구체적 실천결의의 산물로 등장했다기보다는 사회 전체의 민주화 추세에 편승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언론노조운동은 일부 젊은 기자들에 의한 선도적 개혁운동으로 시작되어, 언론이 변신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경영주가 어쩔 수 없이 여기에 따라온 것에 불과했다는 한계도 있었다. 따라서 1990년대 들어서서 언론사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져 자사이기주의가 확산되는 가운데 점차로 위와 같은 한계들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고 언론노동운동은 침체기를 맞게 됐다.

1990년대 들어서서 언론노동운동이 침체 일로를 걷던 가운데 터져 나온 기자들의 촌지수수 사건은, 그동안 언론노조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온 언론민주화 운동과 언론자정운동에 찬물을 끼 얹었다. 즉 언론노동운동이 활성화되면서도 기자들의 촌지수수 관행이 크게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언론노동운동에 대한 신뢰에 큰 손상을 입혔다.

촌지수수 관행이 크게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한국언론연구원의 조사에서 1989년에는 7.4%, 1991년에는 3.7%만이 촌지수수가 전혀 없다고 응답했고, 기자협회의 조사에서도 74.9%가 촌지를 받은 적이 있다고 응답했던 것에서 잘 드러났다.

1991년 2월의 수서사건과 10월의 보사부기자단 촌지사건은 촌지수수의 범위나 액수면에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보사부 기자단의 촌지사건은, 기자단 간사들이 적극적으로 촌지 제공을 요구했고 그 액수가 8천9백50만여원이나 됐다는 점에서 커다란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사건 직후 촌지수수의 통로였던 기자단 해체와 탈퇴 움직임이 이어졌다.

또한 각 언론사들은 언론의 자정을 위해 윤리강령의 제정을 서둘렀고, 취재비 실비지급이 요구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은 실효성 면에서 비판을 받았고 그나마 지속되지도 못했다.
결국 1991년의 촌지수수 사건은, 언론민주화를 위해서는 기자들 스스로의 자정을 위한 굳센 결의와 실천이 선행되어야 하고, 또한 이를 뒷받침해주는 제도적 보완과 개선이 절실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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