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서울역 앞 대우건설 기자실. 오전 11시를 막넘어선 시간. 서울경제신문 편집국 부동산팀 박성태팀장(40)의 ‘교통정리’가 한창이다.
“정두환, 창간특집 잘 챙겨. 자료 다 받았으면 월요일부터 기사 써” “기석이는 유휴지 투자로 돈 번 사람들 찾아서 은우와 나누고” “유찬이는 연락 없냐. 연락 오면 전문 컨설팅 기고 어떻게 됐는지 꼭 좀 물어봐라.”

1주일에 한번씩 갖는 지면회의. 해외취재에 나선 권유찬기자와 건설교통부 2진으로 건설 관련 행정기사를 챙기는 유찬희기자를 제외한 4명의 후배기자들이 모였다. 1만 8천여개에 달하는 복덕방을 출입처로 갖고 있는 이은우기자, 3만개에 달하는 일반건설업체가 취재처인 정두환기자, 3천여개의 건설업체와 종합건설회사를 담당하는 한기석기자, 건축 분야 객원기자로 활약하는 박영신기자.

서울경제신문에서 땅만 보고 사는 기자들이다. 이들은 일주일에 고정적으로 8개면을 꾸린다. 증권·산업 분야와 함께 경제지의 3대축을 담당한다는 자부심으로 버틴다.
회의 중간중간에 박 기자의 무선호출기는 쉴 틈이 없다. 아직 오전이지만 무선호출기는 이미 풀 메모리다. 분양 자료를 돌리겠다는 주택건설 업체, 고정기획물 섭외를 문의하는 건설회사, 한번 들려달라는 대형 건설회사의 연락, 늘상 되풀이되는 ‘일과’가 오늘이라고 예외일리 없다.

좁은 땅이라고 아우성이지만 박 기자를 비롯한 부동산 담당기자들에게 한국은 너무 넓은 나라다. 갈곳도 많고, 눈길을 돌릴만한 사연이 유달리 많은게 한국에서의 ‘땅’문제다.
박 기자가 부동산팀장으로 발령을 받은 것은 1년 6개월전이다. 서울시청 출입까지 포함한다면 기자생활 12년 가운데 꼬박 6년간을 이 분야와 관계를 맺어온 셈이다.

‘맨 땅에 헤딩하기’식의 현장 취재가 없다면 영양가 있는 거리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 이 분야다. 매일 건설회사의 분양 자료로 지면을 제작할 수는 없다. 분양 성적이 곧 경영실적으로 연결되는 부동산 회사들의 부풀리기식 홍보에 휘말려 들지 않기 위해서는 현장 확인이 반드시 뒤따라야한다.

투자 적지나 재테크 전략을 알아보기위해선 해당 지역의 토지 전문가들을 구워삼지 않으면 좋은 기사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과 몸은 대체적으로 따로 노는 법.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다 ‘해소’하기엔 현실이 너무 버겁다.

“내일은 어디로 갈까 생각하면 잠도 잘 안와요.” 기자생활 1년을 못채운 막내 이은우기자의 하소연이 예사롭지 않다. 가야할 곳은 많은데도 반기는 곳은 없다는 것이다. 홍보 자료에 나와 있는데로 써 달라는 것이 업체들의 주문이고 이 주문만큼이나 현장을 확인 하고 싶은 것이 또 기자들의 당연한 욕심이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회의가 거의 끝날 무렵, 대우건설 홍보실 김종한 과장이 들어섰다. “밥이나 먹자”는 얘기다. 오늘은 박 기자가 ‘물주’다. 2주일전 모친상을 당한 박기자가 상가집에서 뜨거운 의리를 보여준 후배기자들과 대우 홍보실 직원들에게 답례하는 의미에서 점심을 사겠다고 나섰다.

부대찌게를 앞에 두고 세상사가 오간다. 어제 후배기자들은 ‘격전’을 치른 모양이다. 술자리 야사가 ‘선문답’에 묻어 있다. “어제 장전한 것은 저이지만 격발한 것은 선배님입니다.” 아마 후배기자들이 선배인 박기자에게 술을 먹자고 했다가 오히려 만신창이가 된 것 같다.

장전과 격발. 박 기자는 문득 자신의 역할이 후배기자들의 ‘장전’을 도와주는 보조수라는 생각을 해본다. 현장에서 전쟁을 치르는 기자들의 후원자이기를 그는 자임한다. 되도록이면 후배기자들에게 자율성을 보장하고 그들이 마음껏 현장을 휘젓고 다닐 수 있도록 ‘바람막이’ 역할을 하고 싶은 것이 그의 욕심이다.

맨땅에 헤딩하기식 현장취재 다반사

“회사에 들르지 말고 현장에서 곧바로 퇴근하라”고 강조하는 것도 기자들이 취재시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라는 생각에서였다. 박 기자 역시 팀장을 맡기 전에는 ‘전사’이기를 희망했다. 다른 언론사 기자들을 ‘물’먹이면서 쾌감을 느끼고 ‘새롭다’ 싶으면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기어이 기사화시키곤 했다.

그런 덕분에 그는 기자 생활 내내 26번의 사내 특종상을 수상했다. 올해에는 회사의 가장 큰 상격인 ‘백상기자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욕심들이 부질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을 넓게 보고 깊게 쓰는 것이 빠른것보다 앞서는 미덕”이라는게 요즘 생각이다.

오늘은 유난히 덥다. 올해중 가장 더운 날씨라고 한다. 지열로 푹푹 찌는 거리를 헤치고 동아건설에 ‘출근’했다. 일주일에 한번은 방문하는 곳이다. 전화는 거의 매일 거는 주요 출입처다. 국내 건설업체 중 도급순위 3위인 이 회사엔 유난히 ‘언론계 선배’들이 많다.

KBS 사회부 차장 출신인 김두영 상무이사, 조선일보 편집부국장을 역임한 유정현 부사장 등 한때 언론계를 주름잡던 선배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고 있다. 아무래도 속사정을 훤하게 들여다보는 언론계 선배들이 있는 곳은 마음이 편하다.

머릿기사 거리가 궁하다 싶으면 ‘SOS’를 치고 아이템을 솔직하게 논의하는 경우도 있다. 오후 3시까지 머릿기사가 비어있던 어제(18일)도 다행히 동아건설을 비롯한 일부 건설사들의 도움으로 지면을 해결했다.
“인덕이 있드만. 역시 베푸는 기자는 다르더라구.” 김두영 상무가 박 기자 모친상에 왔다간 소감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박 기자 상에는 그간 출입처에서 관계를 맺은 사람들로 ‘성황’(?)을 이뤘다.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이 친어머니로부터 고소를 당한 기사 보도를 둘러싸고 김 상무가 약간의 ‘섭섭함’을 표시한다.

“고소, 진정 기사는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구. 일방적인 주장인 경우가 많아.” 응답은 다분히 ‘기자적’이다. “고민 많이했습니다. 다른데도 썼고 회장님이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만만치 않아서.”

11층 전형무 주택사업본부 부사장 방에 들러 국내 주택사업 현황을 취재했다. ‘동아건설 해외에서 국내로 눈 돌리다’ 제목까지 생각하며 기사 재료를 요목조목 알아본다. 부동산 분야 취재원들은 아무래도 ‘노가대’(?) 스타일이다. 의리에 강하고 인간적인 정을 호소한다. 한번 관계를 맺으면 그 끈끈함이 다른 출입처와 비할바가 아니다. 술 좋아하는 것도 이들의 빠뜨릴수 없는 특징이지만 워낙 일이 바빠 이들과 술자리를 갖기가 쉽지 않다. 전 부사장 역시 뒤돌아서는 박 기자에게 예의 인사말을 던진다. “낮에 말고 밤에 만나자고. 그래야 재미있잖아.”

팀장이 되고부터는 아무래도 광고에 신경을 써야한다. 예전처럼 ‘기사와 광고 맞바꾸기식’의 관행은 줄어 들었지만 부동산팀장이 엮어야할 광고물량이 만만치 않다. 회사측도 은근히 이를 기대하는 눈치고 ‘의무방어’ 차원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해내야 한다.

그간 대형 건설업체를 출입하지 않다가 올해부터 현대·동아·대우 등을 자의반, 타의반 맡은 것도 ‘경영전략’과 직접적으로 잇대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굳이 ‘광고’가 아니더라도 대형 업체는 기사가 많이 나갈수록 좋다. 독자들의 관심도 적지 않은데다 ‘기사량’이 곧 해당기업에선 ‘영향력’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지역 토지전문가도 중요 취재원

동아건설을 나서다가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성보개발 백욱제 상무이사. “서로 돕고 살자.” 의미심장한 말을 나누고 발길을 돌렸다. 이제는 귀사를 해야할 시간이다. 월요일자 ‘건축면’을 손봐야 한다. 국내에서 최초로 시도한 ‘건축면’이 반응이 좋다. 덩달아 기분도 좋다.

노트북 앞에 앉았다. 문장을 다듬고 사진을 챙긴다. 편집국은 고된 하루를 끝내고 파김치가 된 동료기자들의 지친 모습들로 가득차 있다. 창밖은 땅거미가 진지 오래다. 오전 9시부터 엘지건설을 시작으로 3개의 건설사를 둘러보고 40통이 넘는 전화 통화를 했으니 오늘도 그런대로 ‘밥값’은 한 셈이다.

독자들에게 ‘효과적인 재테크’ 전략을 제공하는 기자지만 정작 자신은 ‘서울특별시’에서 밀려난 신세다. 안양에 32평짜리 아파트가 그의 전재산이다. 기자생활 10년만에 마련한 집이다. 그곳엔 세살아래인 신혜경씨(37)와 두 딸이 ‘아빠’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만의 ‘땅’을 향할때 그의 발걸음은 비로소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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